[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57)풍년을 만끽하며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57)풍년을 만끽하며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1.10.22 17: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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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잘 지었네” 한 마디는 최고의 찬사
“꽃 같은 처녀가” 노래로 아픈 허리 달래

소평마을은 해마다 풍년이었다. 가뭄과 태풍과 병충해를 모두 이겨내고 살아남은 벼들이 마을을 둘러싸고 황금바다를 이뤘다. 이맘때면 학교에서는 경기민요 ‘풍년가’를 가르쳤다. “풍년이 왔네 풍년이 왔네/ 금수강산으로 풍년이 왔네/ 지화 좋다 얼씨구나 좀도 좋다/ 명년 춘삼월에 화류놀이 가자” 추석을 지나면 조석(朝夕)은 쌀쌀하고 한낮은 따가운 가을볕이었다. 농부는 벼의 빛깔을 보며 벼 베기 할 날짜를 가늠했다. 벼 베기를 ‘추수하다’ 또는 ‘가을하다’로 불렀다.

어래산을 타고 산들바람이 내려왔다. 이제까지 낙산 쪽에서 불던 바람과는 달리 상쾌했다. 벼이삭이 무겁게 고개를 일렁였다. 농부는 이른 봄부터 이제까지, 논 갈고 거름 내고, 모내기, 물대기, 비료하기, 농약치기, 김매기, 피사리를 무사히 마쳤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이제 벼 베기만 남아있었다. 농부는 낫질을 할 때마다 어리광을 부리듯 가슴에 안겨 찰랑거릴 알곡들을 생각하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참새 떼가 우르르 몰려다녔다. 허수아비는 있으나마나였다.

앞공굴에서 바라본 마을 앞 들판. 멀리 어래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앞공굴에서 바라본 마을 앞 들판. 멀리 어래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모내기는 반드시 놉을 들여서 했지만 벼 베기는 대농(大農)이 아니고는 거의 가족끼리 벴다. 농부는 아내와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듯 벼를 베 나갔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낮이면 마을은 텅텅 비었다. 노인들이 남아서 손자를 돌보거나 집을 지켰다. 집을 지키던 개는 무료한 듯 낮잠을 자다가 일어나 골목으로 놀러 나가고 닭들은 먹이를 찾느라 부지런히 두엄을 파 헤쳤다.

소평마을 아이들은 초등학생만 돼도 일을 잘 도왔다. 학교에 다녀오면 으레 책보자기를 던져놓고 알아서 제 할 일을 했다. 갱빈으로 소를 몰고 나가고 소풀을 하러 꼴망태를 어깨에 걸고 집을 나섰다. 늘어진 꼴망태가 걸을 때마다 덜렁거렸다. 소에게 풀 뜯기는 일을 ‘풀 먹인다’라 하지 않고 ‘소 먹인다’라고 했다. 토끼장 풀을 넣어주고 방청소를 하고 요강을 씻었다. 해가 뉘엿할 무렵에 하교(下校)한 큰아이는 논으로 가서 볏단을 논둑으로 날랐다.

학교는 숙제를 적게 내거나 안 내다가 벼 베기가 한창일 때는 가정실습에 들어갔다. 1968년 기록을 보면 10월 24일 목요일은 유엔의 날로 공휴일, 26일 반공일(半空日)인 토요일은 소풍, 28일 월요일부터 30일 수요일까지는 가정실습이었다. 일반적으로 가정실습이 끝난 며칠 후부터는 중간고사였다. 하지만 시험공부는 뒷전이었다. 저녁을 먹고 책상머리에 앉은 아이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릴 뿐 책장을 한 장도 넘기지 못했다. 호롱불에 눈썹이 그을리고 앞머리에 불이 붙었다.

객지로 나갔던 자식들이 틈을 내서 고향을 찾아 일손을 도왔다. 서 마지기 논에 어설픈 일꾼이 가득했다. 바깥공굴 부근 논에 러닝셔츠로 보이는 흰옷을 입은 무리들이 보였다. 읍사무소 직원들이 일손 돕기 운동을 벌이는 것이라고 했다.

벼가 잘려나가는 소리는 경쾌했다. 시퍼렇게 갈린 칼날에 물기를 머금은 벼 줄기가 무청처럼 잘려나갔다. 소풀 할 때 줄피기(부들)를 자르는 기분이었다. 두세 포기를 한꺼번에 잡고 썩둑썩둑 베면 사과나무상자로 만든 토끼장에서 토끼가 뛰어다닐 때와 같은 타닥타닥 소리를 냈다.

아내는 밀린 빨래를 하러 큰거랑으로 가고 농부는 이슬이 마르기까지 낫을 갈고 닭똥을 줍다가 혼자 들판으로 나섰다. 지게 위 싸리나무 바소쿠리 안에는 숫돌, 낫 세 자루, 물주전자와 참을 담은 그릇이 얹혀 있었다. 바소쿠리가 딸린 지게를 바지게라고 했다. 가없는 창공, 능선이 뚜렷한 양동산과 어래산, 산들바람, 한들거리는 코스모스, 한결 찬 느낌이 나는 큰거랑 물, 샛노란 벼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논두렁콩의 콩잎이 벼를 따라 익고 도랑의 고마리와 바랭이는 빛이 바랬다. 미꾸라지는 논에서 물을 뺄 때 물 따라 큰거랑으로 내려가고 개구리와 벼메뚜기가 뛰어오르다가 넘어졌다. 들판은 메뚜기 잡는 사람들로 이 깔렸다. 벼메뚜기는 삼베주머니 채로 소죽 끓일 때 소죽 위에 얹어서 삶았다. 햇볕에 말린 후 날개와 뒷다리를 떼어 내고 간장에 졸여내면 맛있는 도시락 반찬이 됐다.

농촌의 풍경은 서리 내리기 전과 후로 확연히 달랐다. 서리가 내리면 호박잎과 풀잎은 마르고 나뭇잎은 떨어졌다. 메뚜기는 만사가 귀찮은 듯 벼 잎에 앉아 앞발을 들어 연방 머리를 쓰다듬어 내리고 덤불 속에 있다가 ‘서리 맞은 뱀’은 갈 곳을 잃었다. 농부는 농짝 옆에 붙어있는 달력에서 상강(霜降)이 언제인지를 거듭 확인했다. 낙곡(落穀)이 생기지 않게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전에는 벼 베기를 마쳐야 했다.

일손 돕기를 잘 하던 학봉댁의 딸들. 정재용 기자
일손 돕기를 잘 하던 학봉댁의 딸들. 정재용 기자

날이 갈수록 농부의 육체는 쇠잔해 갔다. 이사야 선지자가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라고 한 그대로였다. 벼 베기로 엎드려 있는 농부의 허리는 저고리가 말려 올라가 훤히 드러났다. 가을 햇살이 목덜미와 잔등에 뒹굴었다. 온몸이 잘 구워진 옹기처럼 검붉었다.

한들 논에서 혼자 벼 베기를 하던 정운수 씨가 허리를 펴면서 노래를 불렀다. “꽃 같은 처녀가 꽃밭을 매는데/ 반달 같은 총각이 손목을 잡누나 (얼씨구 절씨구)// 반달 같은 총각아 내 손목 놓아라/ 호래이(호랑이) 같은 우리 오빠 망보고 있단다 (얼씨구 절씨구)// 꽃 같은 처녀야 네 그 말을 말어라/ 호래이 같은 너희 오빠 내 처남 된단다 (얼씨구 절씨구)”

그의 집은 교회를 지나 우물터 가는 길의 마을 끝에 있었는데 슬하의 경택, 준택, 동택 세 아들은 아직 어렸다. ‘풍년초’ 담배를 곰방대에 넣어 피우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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