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52)해마다 여름 오면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52)해마다 여름 오면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1.07.23 1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교회는 하기학교로 신나고
농부는 빨리 논매기를 마치고 해수욕 갈 생각

여름은 참으로 길었다. 6월 보리 벨 때부터 시작한 여름은 8월 세벌논매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됐다. 7월 25일이면 북부학교는 방학에 들어가고 소평교회는 기다렸다는 듯이 ‘여름성경학교’를 시작했다. 월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새벽까지 새벽, 낮, 저녁 하루 세 차례였다.

소평교회는 소평마을의 유일한 공공기관이었다. 교회는 해마다 여름이면 성경학교를 열었다. 보통 7월말인데 강사 사정상 8월초로 미루기도 했다. 한 주 전에 포스터가 골목 곳곳에 붙고 아이들은 희망에 부풀었다.

전기가 없던 시절이라 부채질이 유일했지만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이 없다보니 볼 것도 없고 방학이라 해도 달리 갈 데도 없어 낯선 선생님이 와서 보여주는 융판(絨鈑) 그림과 인형극은 인기였다.

옛날에는 ‘학기학교’라고 불렀다. “해마다 여름 오면 즐거운 학기학교”로 시작하던 교가는 여름성경학교가 되면서 “흰 구름 뭉게뭉게 피는 하늘에 아침 해 명랑하게 솟아오른다”로 바뀌었다. ‘강사 선생님’은 노래, 설교, 동화, 특별활동, 레크리에이션을 도맡아서 했다. 레크리에이션을 ‘소창’(消暢)이라고 불렀다.

더운 날씨에 농사일로 바쁜 가운데도 교인들은 돌아가면서 강사와 반사(班師)들에게 점심을 제공하고 아이들의 간식을 장만했다. 금요일 오후에는 특별활동 시간에 그린 작품이 예배당 벽에 전시됐다.

1981년 8월 새로 지은 예배당에서 정석주 선생이 어린이들에게 찬양 지도를 하고 있다. 정재용 기자
1981년 8월 새로 지은 예배당에서 정석주 선생이 어린이들에게 찬양 지도를 하고 있다. 정재용 기자

이육사(1904-1944) 고장의 7월이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이라면 소평마을의 7, 8월은 논매기 철이었다. 벼꽃이 피기 전에 세벌논매기까지 마치려면 하루도 쉴 틈이 없었다. 벼꽃은 처서(處暑) 무렵에 폈다. 8월 23일 경이었다.

여름이 짙어질수록 벼들은 한층 짙푸르고 줄기는 부풀어갔다. 농부는 벼가 알이 배기 전에 논매기를 끝내려고 서둘렀다. 벼를 다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 전에 논매기를 끝낸다는 것은 ‘한여름에 논을 맨다’는 뜻의 다른 말이었다.

뙤약볕에 논을 매는 농부의 삼베저고리 위로 소금 꽃이 피어났다. 예배당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서둘러 점심을 먹고 갱빈으로 소를 먹이러 나섰다. 논매기가 끝날 때까지 소풀을 하고, 저녁 소죽을 쒀 먹이고, 외양간에 모깃불을 피우고, 모기장을 치는 일 모두 아이들의 차지였고 아이는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모기장을 '방장'(房帳)이라고도 했다.

농부의 아내도 집안일을 해 가면서 논매기를 도왔다. 이렇게 거들어주면 서 마지기 논 한 도가리 외골치기 하는 데 하루 반 정도 걸렸다. 한 방향으로 매는 것을 ‘외골치기’라고 했다.

고래전 논은 집에서 가까워서 좋았다. 논은 직사각형이었다. 먼저 짧은 방향으로 외골치기를 하고 자리를 옮겨 양동들 논으로 가서 외골치기를 했다. 그리고 고래전으로 다시 와서 이번에는 긴 방향으로 외골치기를 했다. 이렇게 외골치기를 두 번 하는 것을 ‘양골치기’라고 했다. 양골치기를 마치면 비로소 ‘한 벌’ 논매기가 됐다.

양골치기를 한꺼번에 하지 않고 중간에 양동들을 끼워 넣는 것은 고래전 벼의 뿌리가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농부는 많은 식구를 굶기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한 소작을 많이 했다. 그러다보니 온 여름을 논에서 지내야 했다.

농부의 살갗은 벌겋게 익어서 구리 빛이다 못해 아프리카 동부 케냐와 탄자니아의 마사이족이나 프랑스의 화가 폴 고갱(Paul Gauguin, 1948-1903)의 ‘타이티의 여인들’처럼 검게 탔다. 개는 혀를 길게 늘어뜨린 채 헐떡거리고 닭은 양 날개를 반쯤 들어 올려 깃털 사이로 바람을 쏘였다. 농부는 아내가 간장을 풀어서 만든 오이냉채를 연거푸 두 사발이나 들이켰다.

가끔 소나기가 내려 땅을 식혔지만 단 쇠에 물 붓기였다. 농부는 강한 햇살에 콩 볶듯 볶이고 무더위에 옥수수나 감자처럼 삶겼다. 그 몸뚱이를 먹겠다고 낮에는 쇠파리 밤에는 벼룩과 모기가 몰려들었다. 쇠파리는 큰 몸체에 회색 빛깔이 감돌고 튀어나온 눈은 빨간색이었다. 쇠파리는 소가죽을 뚫는 실력으로 농부의 러닝셔츠 위에 앉아 빨대를 꽂았다.

이렇듯 무더워도 소평마을 사람들은 더위를 원망하지 않았다. 벼농사는 고온다습(高溫多濕)한 기후에 적합한 작물이다. 세종 때(1445년) 완성한 용비어천가의 제2장은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뮐쌔/ 곶 됴코 여름 하나니’로 시작한다. 이를 현대어로 풀이하면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기에/ 꽃이 좋고 열매가 많으니’가 된다. 농부들은 여름이 여름다워야 ‘여름’이 많아진다는 이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초기가 지나간 자리의 진흙은 뒤집어지고 물풀은 흙속에 묻혔다. 통풍이 잘 되니 뿌리는 강해지고 줄기는 맘껏 포기를 늘려 나갔다. 농부는 논매기를 마친 논에 다시 물을 대고 비료를 쳤다. 벼 베기 때 보면 벼 포기는 15~20개로 불어나 있었다. 모내기 때 한 곳에 3포기를 꽂았던 자리였다.

소평마을에서 안강읍내로 나가는 앞길이 남쪽으로 뻗어있다. 그 길의 끝은 철둑으로, 오른쪽으로 가면 안강역 왼쪽으로 가면 포항방면인 양자동역이다. 멀리 오른쪽으로 형제봉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소평마을에서 안강읍내로 나가는 앞길이 남쪽으로 뻗어있다. 그 길의 끝은 철둑으로, 오른쪽으로 가면 안강역 왼쪽으로 가면 포항방면인 양자동역이다. 멀리 오른쪽으로 형제봉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경주역에서 포항역으로 가는 동해남부선은 단선이었다. 들판에서 일하다가 보면 안강역에서 양자동역으로 오가는 기차가 반드시 기적을 울렸다. 양자동으로 갈 때는 기계천 위로 지나는 철교를 건너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위험을 알리는 것이고, 안강역으로 들어갈 때는 포항 영천간 국도 위를 지나는 철교 때문일 터였다.

기적소리에 농부는 잠시 서서 비 오듯이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이런 것을 두고 ‘비지땀을 흘린다’라고 하고 ‘콩죽처럼 흘린다’고도 했다. 농부는 논매기가 끝나는 대로 포항해수욕장으로 가족여행을 가리라 다짐했다. 푸른 물결 넘실거리는 바다는 생각만으로도 즐거웠다. 밥통에 밥 가득 담고 평소에 먹던 반찬 가져가면 큰돈 들 것도 없었다. ‘물에 들어갔다 나와 밥 먹고’를 거듭하다 밥 떨어지면 집으로 향했다.

안강역에서 7시 45분 첫 기차를 타면 종착역인 포항역까지는 30분에 불과했다. 역에 내려서 송도해수욕장까지는 걷는 데도 30분 정도였다. 걷는 길에 죽도시장이 있었다. 어물전을 돌며 이것저것을 눈여겨 봐 두었다가 귀갓길에 살 요량이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