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㊻ 세 천사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㊻ 세 천사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1.04.26 10:0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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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 10명이 없어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
마음이 큰거랑 물처럼 맑아서 천사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아브라함은 대낮 더위를 피해서 자기 장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웬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서 있었다. 아브라함은 그 사람들이 천사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아브라함은 엎드려 절 한 후 발 씻을 물을 떠다 드리고 급히 음식을 만들어 대접했다. 식사를 마친 그들은 다시 길을 나섰다. 아브라함도 배웅하려고 얼마쯤 같이 걸었다.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한 사람이 말했다.

“내가 앞으로 하려고 하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오는 저 울부짖는 소리가 너무 크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엄청난 죄를 저지르고 있다. 이제 내가 내려가서, 거기에서 벌어지는 모든 악한 일이 정말 나에게까지 들려 온 울부짖음과 같은 지를 알아보려한다”

소돔 성에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고 있었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천사들과의 의인(義人) 흥정이 벌어진다. 최종적으로 천사는 의인 열 명만 있어도 소돔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노라 약속한다.

1960, 70년대에 소평마을에도 천사 셋이 살고 있었다. ‘긴상’이라고 불리던 김씨(金氏)와 황일조 씨 그리고 권태관 씨였다. 셋 모두 남자 어른으로서 마음이 순진무구(純眞無垢)하고, 잘 웃고, 인사 잘 하고, 겸손하고, 친절하고 그리고 모든 일에 성실했다.

긴상은 김씨 아저씨의 이름이었다. 어른들은 긴상이라고 부르고 아이들은 긴상 아저씨라고 불렀다. 사실 ‘긴상’(きんさん)은 ‘김씨’의 일본식 표기일 뿐이었다. 사람들도 굳이 이름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덕동댁에 살았다. 덕동어른의 먼 친척뻘이라고 했다. 그가 언제 어디에서 와서 그 집에 살게 되었는지 자세히 아는 사람도 없었다. 일본에 오래 살다가 해방되면서 혈혈단신으로 소평마을에 왔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키와 몸집이 작고 ‘이부가리’로 짧게 깎은 흰머리는 늘 단정했다. 그는 천성이 부지런해서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농사철은 물론이고 농한기인 겨울철에도 웬만한 추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양동산으로 나무하러 다녔다.

쉬는 날은 매 주 일요일이었다. 덕동댁 집이 ‘믿는 집’이었기 때문에 그도 일요일이면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예배당에 와서 온전히 주일(主日)로 지켰다. 새벽기도회로부터 낮예배, 저녁예배였다. 그는 예배당 대청소를 한다거나 무 구덩이를 판다거나 기둥에 니스 칠을 새로 하는 등 교회 일에 적극적이었고 교회서 가는 야외예배에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1981년 8월 새 예배당에서 정석주 선생이 매직으로 쓴 ‘어린이 찬송가’ 괘도로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지도하고 있다. 황일조 선생이 만든 붓글씨 괘도는 기와집 옛날 예배당 때 사용됐다. 정재용 기자
1981년 8월 새 예배당에서 정석주 선생이 매직으로 쓴 ‘어린이 찬송가’ 괘도로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지도하고 있다. 황일조 선생이 만든 붓글씨 괘도는 기와집 옛날 예배당 때 사용됐다. 정재용 기자

또 다른 천사는 황일조 씨였다. 황일조 씨는 금산댁 큰아들로서 기상이 높고 멋을 아는, 한 마디로 표현하면 난사람이었다. 읍내 깡패들도 그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그는 붓글씨를 잘 썼다. 당시 주일학교 예배에서는 문종이(창호지) 전지(全紙)에 붓글씨로 쓴 ‘어린이 찬송가’ 괘도를 사용했는데 황 선생의 수고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의 글자 한 자 한 자는 살아서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꽃가지에 내리는 가는 빗소리, 연못가에 자라는 한 송이 백합, 우리는 자라는 주의 어린이, 아이들의 동무는 누구뇨, 사랑으로 우리를 길러주시는, 주의 발자취를 따름이, 샛별 같은 두 눈을 사르르 감고, 하나님 아버지 고맙습니다, 참 기쁜 맘을 가지고 예수 믿으면, 예수의 얼굴을 한번이라도 보고보고 싶으나, 흰 구름 뭉게뭉게 피는 하늘에, 아 재미있어라 선생님의 동화, 여러분 우리 동무여 등 50여 곡이었다. 이 붓글씨 괘도는 나중에 도화지에 매직펜으로 그린 악보 괘도가 나오면서 창고에 보관되었다가 물난리를 겪으면서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그는 결혼하여 단양으로 이사를 갔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십년이 채 못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사람을 만나면 실실 웃고 어느 날부터는 마을에서 큰거랑 내려가는 비탈길 용강댁 논둑에 곡괭이로 굴을 파기 시작했다. 비행기를 숨겨놓을 격납고라고 했다. 비행기를 그 안에 들여놓았다가 양동산 너머에서 적이 나타나면 곧 바로 출격하여 공중전을 벌인다고 했다. 다 파고는 그 옆에 한 개 더 팠다. 그는 어릴 적에 일본에서 태평양전쟁을 겪었고 한국으로 와서는 6.25전쟁이 끝나고 나라가 어수선할 때 군대에 다녀왔다. 그의 머릿속은 아직도 전쟁 중인 것 같았다.

마지막 천사는 권태관 씨였다. 그는 권 물봉댁에서 먹고 자고 일했다. 큰 머슴을 도와서 작은 머슴처럼 일했다. 권 물봉어른의 먼 집안 친척이라고도 했다. 일찍 부모를 여의어 오갈 데 없는 그를 거두어 주는 것이라고 했다. 권 물봉댁은 물봉어른이 동네 반장을 오래해서 권 반장댁으로도 불렸다. 물봉어른은 점잖고 인품이 좋아서 마을사람들로부터 신임이 두터웠다. 그리고 큰 부자였기에 텔레비전도 마을에서 가장 먼저 들여놓아 매일 저녁이면 그 댁의 멀방(안방의 옆방)은 연속극을 보려는 사람들로 만원을 이뤘다.

권태관 씨는 키는 작았고 한 쪽 다리를 절었다. 얼굴이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케네디를 닮아서 마을사람들은 그를 케네디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는 온유하고 겸손하여 상대방이 약간이라도 연상(年上)이다 싶으면 스스럼없이 공대했다. 그의 소꼴 지게는 매번 바소쿠리에 넘쳤고 구푸려 길게 늘어뜨린 목덜미는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여행에 참여했던 교우들이 1982년 4월 6일 경주국립박물관에서 기념 촬영하고 있다. 둘째 줄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권태관 씨, 두 번째가 김씨다. 정재용 기자.
1982년 4월 6일 소평교회 교우들이 경주국립박물관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둘째 줄 오른쪽 첫 번째가 권태관 씨, 두 번째가 김씨다. 정재용 기자.

아브라함을 떠난 천사들이 소돔 성에 도착하여 롯의 집에 들어가니 남자들이 몰려와서 롯의 집을 에워싸고 “오늘 저녁 네 집에 온 남자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을 끌어내라. 우리가 강간하겠다”라고 외쳐댔다. 당시에 벌써 동성애가 성행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하나님은 소돔 성과 가까이 있던 고모라 성을 함께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다. 롯이 “살고자 하는 사람은 해 뜨기 전에 이곳으로부터 탈출하라”고 경고했지만 사람들은 그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 결국 아침 해와 더불어 하늘로부터 유황불이 쏟아지고 두 도시는 폐허로 변했다. 두 도시가 있던 곳은 사해에 인접한 동쪽 해안으로 오늘날 요르단 땅이다.

소평마을의 세 천사는 어떤 예언을 한다거나 권능이 있어 기적을 행하지도 않았다. 그냥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고 겸손하며 마음이 큰거랑 물처럼 맑아 천사였다. 주인이 힘든 일을 시켜도 말없이 순종할 뿐 화를 낸다거나 얼굴 한번 찡그리는 법이 없었다. 어쩌면 소평마을이 연중행사처럼 겪던 물난리에서 구원을 얻게 된 것도 이들 세 천사 덕분인지 모를 일이다.

소평마을은 1884년경에 조성되었는데, 1991년 8월 ‘글래디스’ 태풍을 끝으로 이듬해 상습 수해 재난 지역으로 지정되어 ‘창마을’(창말)로 집단 이주했다. 50호가 살던 집터는 100여 년 전처럼 다시 논으로 돌아가고 천사들도 마을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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