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55)금의환향을 꿈꾸며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55)금의환향을 꿈꾸며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1.09.10 10: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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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바람 따라 객지로 나가
가난 벗어나는 발판 마련

'안강북부국민학교’는 한 학년에 두 학급짜리의 전형적인 농촌학교였다. 남자 1학급, 여자 1학급짜리였다. 학년 초가 되면 담임선생님은 어김없이 가정실태조사를 했다. 당시는 손을 들게 해서 조사하는 게 예사였다. 같은 반끼리 매년 조사하다보니 서로가 가정형편을 훤하게 알고 있었다. 조사가 급해서인지 종이가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바쁜데다 등사하기가 귀찮아서인지 하여튼 공개적으로 했다.

등사하려면 등사원지를 등사판 위에 얹어 철필로 긁어야 했다. 철필 따라 원지(原紙)에 칠해져 있던 파라핀이 긁혀나갔다. 그 다음은 프린트였다. 원지를 등사기의 얇은 천 위에 붙이고 그 위를 롤러로 밀었다. 롤러의 잉크는 원지와 천을 통과하여 종이에 찍혔다. 이 등사판을 ‘가리방’(がりばん, がり版)이라고 불렀다.

학부모의 대부분은 직업은 농업이고 학력이 국졸(國卒)이었다. 문해(文解)도 있었다. 선생님은 “부끄러워 할 것 없다. 우리 아버지도 학교 문 앞에도 안 가 봤고 평생 농사만 지었다”라고 했지만 어쩐지 거짓말 같았다. 국졸과 농업은 손을 들 필요가 없었다. 다른 것 손들고 나서 나머지를 적으면 됐기 때문이다. 전기가 안 들어오던 때라 TV, 자동차, 수도(水道)는 그냥 넘어가고 라디오, 시계, 재봉틀, 자전거, 리어카, 신문 등도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앞공굴에서 서쪽으로 본 앞거랑이다. 안강에서 기계 쪽으로 가다가 앞거랑 부근에서 우회전하여 이 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왔다. 정재용 기자
앞공굴에서 서쪽으로 본 앞거랑이다. 안강에서 기계 쪽으로 가다가 앞거랑 부근에서 우회전하여 이 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왔다. 정재용 기자

소평마을 사람들에게 농사는 천직(天職)이었다. 아니, 농사를 천직으로 아는 사람들이 몰려 든 마을이었다. 제 논을 사서 들어오는 사람은 드물었다. 믿는 것이라고는 ‘이 광활한 들판에, 부지런히 움직이는데 설마 살아있는 입에 거미줄 치랴’는 굳은 신념 하나였다.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농부는 자식이 커가는 것으로 보람으로 여겼다. 비록 된장에 보리밥이지만 배불리 먹고, 가을이면 김장하고, 엄동설한이 와도 추위를 막아 줄 집이 있는 것으로 행복했다. 농부는 자신의 몸은 뼈가 으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식들에게는 가난을 물러주고 싶지 않았으나 달리 방법은 없었다.

농부의 평생소원은 자기 논을 갖는 것이었다. 소작은 죽도록 일을 해도 언제나 제자리곰배였다. 소작료는 타작한 곡물의 5할이었다. 그것도 그냥 주는 게 아니라 가마니를 쳐서 담아 소달구지로 읍내 정미소까지 내다 주는 조건이었다. 농비(農費)는 오롯이 소작인 몫이었다. 그것까지 계산하면 소작인에게 남는 것은 3할 남짓이었다. 그런 소작도 혹시 지주의 눈 밖에 날까 전전긍긍했다. 소작을 얻는다는 것 자체가 지주(地主)의 시혜(施惠)였다.

농부로서 가장 큰 문제는 자녀의 공부였다. 농부는 졸업이 가까워오면서 밤잠을 설쳤다. 송아지를 팔아야 할 것 같았다. 배내기해서 겨우 한 마리 생겼는데, 그놈이 크면 남의 소를 안 빌려도 되는데, 더 잘사는 집도 공부를 안 시키는데… 하룻밤에 집을 몇 채나 짓고 허물었다. 똑똑한 자식이 부모 잘못 만나 고생길로 간다는 자책에 가슴을 쳤다.

자녀들은 날만 새면 들판으로 나가 해가 저물어서야 집으로 들어오는 부모를 지켜보면서 일찍 철이 들었다. 피곤에 지친 앙상한 얼굴, 새카만 피부, 뼈마디만 남은 손, 쪼들리는 살림살이가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효도를 다짐했다. 공부를 더 안 시켜줘도 크게 원망하지 않았다. 먹고 싶은 것과 입고 싶은 것을 자제할 줄 알았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부모의 소원 이뤄 드릴까 고민했다.

이 즈음 정부는 농업 위주에서 외국자본을 도입해서 산업을 발전시키고 수출에 힘을 기울였다.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을 시작으로 제2차(1967~1971), 제3차(1972~1976)을 계획을 추진해 나갔다.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섬유, 신발, 가발, 합판 등 제품을 생산하여 미국, 일본 등지로 수출했다. 아이가 말했다. “아버지, 우리 집도 경제개발 5개년 해요” “그래, 그러자” 아버지가 웃었다. 마을 청년들은 직장을 따라 객지로 나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월급을 타면 집으로 최소한의 용돈만 남겨두고 전액 고향으로 보냈다. 못다 한 공부는 벌어가면서 했다. 농부는 80kg들이 쌀 몇 가마니에 해당하는 돈을 받아들고 눈물을 글썽였다. 철없는 줄로만 알았던 자식이 대견스럽고 객지에서 고생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렸다. 농부는 그 돈으로 논을 사고 남은 아이들을 공부 시켰다. 곤동 어른은 슬하에 딸 일곱을 두고 막내로 아들을 얻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효성이 지극해서 마을 청소년들의 귀감이 됐다.

1981년 9월 12일 추석 오후 마을 멋쟁이들이 갱빈 방천을 찾았다. 뒤로 양동산이 보인다. 왼쪽부터 강성자, 정재화, 이재숙, 황수란 씨. 정재용 기자
1981년 9월 12일 추석 오후 마을 멋쟁이들이 갱빈 방천을 찾았다. 뒤로 양동산이 보인다. 왼쪽부터 강성자, 정재화, 이재숙, 황수란 씨. 정재용 기자

객지에 나갔던 자녀들은 농번기가 되면 틈을 내서 고향으로 와서 일손을 도왔다. 보리를 베고 모내기를 하고 가을에는 벼 베기를 했다. 안 오면 불효였다. 아무리 바빠도 부모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다녀가야 했다. 어느 집의 뉘가 언제 와서 무슨 일을 하고 갔는지는 금방 마을을 돌았다.

추석과 설 명절은 설렘의 대명사였다. 농부는 아무리 가난해도 떡을 하고 자녀들에게 빔을 사 입혔다. 빔을 마을사람들은 ‘치장’이라고 했다. 말이 그렇지 실제는 어차피 사 입힐 옷을 기다렸다가 명절에 맞춘 것에 불과했다. 명절 며칠 전부터는 객지에 나갔던 자녀들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멋쟁이 옷 입고 양손에 선물 가득 들고 벙싯벙싯 웃으면서 들어왔다. 곤실댁 앞마당에 나와 있던 사람들은 손차양을 치고 키와 걸음걸이로 봐서 누구일 것이라 점을 쳤다. 동생들이 마중하러 앞공굴을 향해 달렸다. 심심찮게 택시가 들어왔다. 기계 방향으로 가다가 앞거랑 부근에서 우회전하여 앞거랑 둑을 따라 달렸다. 뽀얀 먼지가 꼬리를 물었다.

부모와 자녀가 부둥켜안고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자녀들은 집에 머무르는 동안 객지에서 고생한 얘기는 입도 뻥끗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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