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54)군것질이 그리울 때면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54)군것질이 그리울 때면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1.08.23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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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팔을 걷어붙이고 뚝딱
먹을 것 만들어 내

비가 오면 입이 심심한 것은 어른이나 아이나 마찬가지였다. 농촌은 비 오는 날이 쉬는 날이었다. 농부가 말했다. “뭐 먹을 거 없나?” 아내가 받았다. “아침 먹은 지 얼마 됐다고” 안방에 걸린 괘종시계가 참 때를 가리키고 있었다. 배꼽시계는 정확해서 참 먹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보리밥은 고봉으로 먹고 가반(加飯)을 해도 허탕이었다. 방귀 몇 번 뀌고 나면 끝이어서 농사일에 참은 필수였다.

농촌은 말갰다. “돈 나올 모퉁이가 죽을 모퉁이”로 통하는 농촌에서 시장에 가더라도 군것질거리는 뒷전이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일하러 나간 틈을 타서 사카린을 물에 타서 보릿짚 빨대를 꽂았다. 선생님이 들려주는 ‘훈장님의 꿀단지’ 전래동화가 제대로 먹혀들던 때였다. 옛날에는 단 음식이 그만큼 귀했다. '이만갑'(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탈북민(脫北民)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북한은 지금도 설탕이 매우 귀하다고 한다.

농촌은 없는 살림에 자녀들은 많아서 뭐든지 있는 게 한정이었다. 삼시세끼 밥해대는 것도 벅찬데 비가 내려 모든 식구가 집안에 오도카니 있는 날은 간식까지 걱정해야 했다. 농부의 아내가 말했다. “뭐 해주꼬? 내 손가락 빼주까?”

부엌 앞에 연탄난로가 있고 그 위에 백철 솥이 얹혀있다. 학봉댁 황분조 씨(사진)는 음식 솜씨가 좋기로 소문났다. 정재용 기자
부엌 앞에 연탄난로가 있고 그 위에 백철 솥이 얹혀있다. 학봉댁 황분조 씨(사진)는 음식 솜씨 좋기로 소문났다. 정재용 기자

만만한 게 채전의 옥수수와 감자였다. 뒤뜰로 가서 옥수수 몇 개를 꺾어왔다. 옥수수는 가지나 호박, 고추처럼 여름 내내 달렸다. 익었는지 아닌지는 수염이 마른 정도로 알 수 있었다. 감자는 창고 바닥에 널널하게 널려 있었다. 갱빈 밭은 모래밭이라서 감자가 잘 됐다. 캐온 감자가 썩지 않도록 응달에 말렸다. 널어놓으면 썩어가는 것을 빨리 발견할 수 있어 좋았다.

감자는 두고두고 지져먹고 볶아먹고 삶아먹었다. 채썰기에 청양고추, 마늘 다져넣은 감자 반찬은 인기였다. 깨소금 고명이 맛을 더했다. 고추장 진하게 푼 물에 두 토막 낸 감자와 멸치를 넣고 졸인 반찬은 감자가 떨어질 때까지 밥상에 올랐다. 통감자를 껍질 채 삶아서 먹기도 했다. 이런 감자를 ‘피(皮)감자’라고 했다. 물론 먹을 때는 껍질을 벗긴다. 고추장에 찍어서 반찬으로도 먹었다.

간식은 껍질을 칼이나 숟가락으로 벗겨내고 삶아먹었다. 숟가락으로 긁는 것도 ‘깎는다’로 통했다. 비 오는 날 툇마루에 식구들이 둘러 앉아 감자를 깎는 풍경은 ‘행복’ 그대로였다. 숟가락 한쪽 모퉁이는 비스듬히 닳아있었다.

농부의 아내는 마당 한 쪽에 걸린 백철 솥에 감자와 옥수수를 쌓고 그 위에 소금과 소다와 사카린 탄 물을 끼얹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우산을 펼쳐들고 한 손으로 불을 넣었다. 보리짚단 타면서 내는 작은 폭발음이 우산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어울려 경쾌했다. 뜨거운 솥뚜껑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불협화음으로 간섭했다.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유화 ‘감자먹는 사람들’은 어두컴컴한 분위기에 우중충한 얼굴이었지만 농부네 가족은 폭소를 연발했다. 옆집 할머니가 시끄럽다는 것을 핑계로 놀러왔다.

감자는 하얀 감자가 대부분이지만 보라색 감자도 있었다. 충주 탄금대공원에 가면 권태응(1918-1951)의 ‘감자꽃’ 노래비가 있다. “자주 꽃 핀 건 자주 감자/ 파 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 건 하얀 감자/ 파 보나 마나 하얀 감자” (동시 ‘감자꽃’의 전문) 이 시는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에 반항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칼국수 만들 때 나오는 꼬리도 간식이었다. 홍두깨로 반죽을 얇게 밀어 둘레판(두리반) 정도 커지면 빨래개듯 길게 접어서 부엌칼로 썰었다. 맨 마지막의 끄트머리는 썰지 않고 아이들에게 주어 잿불에 구워먹도록 했다.

밀가루 떡도 자주 쪄 먹었다. 여름에는 발효가 잘 돼서 오전 일찍 밀가루를 후리면 저녁 무렵에 찔 수 있었다. 밀가루 반죽을 묽게 하는 것을 ‘후리다’라고 했다. 반죽의 핵심은 물에 소금, 술약(이스트), 소다, 사카린을 각각 얼마만큼 넣느냐와 밀가루를 얼마나 부어 적당하게 묽게 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수시로 삼베보자기를 들쳐보다가 한껏 부푼 시점에 쪘다. 그 시각을 놓치면 부푼 것이 도로 가라앉아 영 맛없는 떡이 됐다.

반죽은 커다란 백철 다라이 안에서 술이 괴듯 북적북적 소리를 내며 부풀었다. 시큼한 막걸리 냄새가 났다. 2배 정도 부풀면 찔 때가 됐다는 신호였다. 농부의 아내는 채반에 삼베를 깔고 그 위에 반죽을 부었다. 그때 미리 삶아 놓았던 강낭콩이나 완두콩을 섞으면 더 맛있는 ‘밀떡’이 됐다. 마을사람들은 강낭콩을 ‘울콩’이라하고 완두콩을 ‘엔드마메’라고 불렀다. 이는 완두콩의 일본어인 ‘엔도우’(えんどう, 豌豆)에 콩(まめ)을 덧붙인 말이었다. 잘 만들어진 떡은 스펀지마냥 푹신푹신했다. 떡은 연하게 찢어지고 가운데는 구멍이 뻥뻥 뚫려 있었다.

1984년 초가을 학봉댁 손녀 지혜. 김치가 이에 낀 듯하다. 정재용 기자
학봉댁 손녀 지혜(1984년 초가을). 정재용 기자

비교적 손쉽게 하고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군것질거리는 밀을 볶는 것이었다. 콩과 섞어서 볶기도 했다. 이때도 밀가루 떡을 할 때처럼 소금과 소다와 사카린을 녹여 그물에 밀을 담가놓았다가 볶으면 맛있었다. 밀은 논에 직접 갈아서 먹었다. 그 밀을 빻아서 국수를 만들고 누룩을 디뎌 술을 빚었다. 보리미숫가루를 만들어 놓고 물에 타 먹기도 했으나 아이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콩고물을 만들어 간식으로 먹고 밥을 비벼먹기도 했다. 농부의 아내가 콩고물 먹다가 죽은 시어머니 이야기를 했다.

어느 마을에 못된 며느리가 있었다. 그 시어머니의 고향은 합천이었다. 콩고물 한 움큼을 막 입에 털어 넣는 것을 본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님, 고향이 어디에요?” “합천!” 시어머니는 목이 막혀 죽었다.

가을이 짙어 가면 호박은 누렁덩이가 됐다. 호박떡은 별미였다. 찬 이슬이 내리면 농부는 내년 여름을 기약하며 백철 솥을 떼 내고 바깥 부엌을 허물었다. 추석이 여릿여릿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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