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㉓봄비, 그 생명의 묘약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㉓봄비, 그 생명의 묘약
  • 정재용 (엘레오스) 기자
  • 승인 2020.03.18 09: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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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물주는 비와 바람으로 사계절을 주관하고,
부흥회를 통하여 심령을 일깨웠다.

봄비가 내릴 때마다 날은 조금씩 풀렸다. 가을에 가랑비가 내릴 때마다 날씨가 추워지고 온 땅을 꽁꽁 얼리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이어서 봄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조물주는 비와 바람으로 사계절을 주관하는 모양이었다. 이 즈음 소평교회는 “빈들에 마른 풀 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성령의 단비를 부어 새 생명 주옵소서” 찬송가를 많이 불렀다.

봄비는 땅과 나뭇가지를 두드리고 거랑(개천)으로 흘러내려 물고기를 불러 올렸다. 봄비가 닿는 곳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다. 나뭇가지는 움을 틔우거나 꽃망울을 내밀고 땅은 새순과 벌레를 내 보냈다. 땅속으로 스며든 빗물은 잠자던 개구리를 깨웠다. 큰거랑 빨래터에는 송사리 떼가 몰려들었다.

1977년 봄, 소평교회는 두 번째 예배당 기공식을 했다. 첫 예배당을 배경으로, 뒷줄 오른쪽에서 일곱 번째가 신명철 전도사. 정재용 기자
1977년 봄, 소평교회는 두 번째 예배당 기공식을 했다. 첫 예배당을 배경으로, 뒷줄 오른쪽에서 일곱 번째가 신명철 전도사. 정재용 기자

 

농부는 비가 그친 틈을 타서 오른쪽 어깨에 삽을 걸치고 논을 한 바퀴 돌았다. 보리를 간(씨를 뿌린) 양동들, 섬배기, 모래골, 야마리 논은 배수가 잘 되고 있는지, 무논인 고래전은 둑이 터지지는 않았는지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겨우내 검푸르게 얼었던 보리는 초록으로 생기를 되찾고 농수로 둑에는 큰개불알풀, 쇠별꽃, 벼룩나물 등 두해살이풀이 다투어 돋아나 논둑을 덮었다.

앞 도랑과 마을 앞 무논에는 개구리가 많았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들이 가장 먼저 할 일은 짝을 찾는 일이었다. 밤이면 개구리 소리가 마을을 뒤덮었다. 암컷 개구리는 울지 않는다. 암컷을 향한 수컷의 세레나데(serenade 소야곡, 밤에 연인의 집 창 밖에서 부르는 사랑 노래)인데 모두가 개구리하면 우는 걸로 알았다. 보리밭 매기에 지친 농부들은 밤새도록 울어대는 우는 개구리 소리를 자장가 삼아 단잠을 이뤘다.

개구리 소리 잦아진 어느 날 앞 도랑과 무논 곳곳에 개구리 알이 물속에 일렁거렸다. 투명한 젤리 속에 땡땡이 무늬처럼 까맣게 박힌 알들이 서로 엉겨 한 덩어리를 이뤘다. 두 손 안에 가득할 정도였다. 가끔 띠 모양으로 된 것도 보였는데 그건 두꺼비 알이었다. 개구리 알은 열흘 정도 지나면 올챙이로 부화했다.

농부들은 봄비가 내리고 햇볕이 따스해지면 못자리 준비를 했다. 물대기 좋은 논에 좁은 둑을 지르고 그 안에 못자리를 만들었다. 볍씨를 뿌렸을 때 발아가 잘 되도록 망을 고르게 짓고 위에 부드러운 흙을 뿌리는 일이었다. 볍씨는 추수 때 가려 놓은 좋은 종자를 독이나 ‘버지기(버치)’에 넣어 불려서 촉(싹)이 트게 한 것이다. 볍씨 불리는 독이나 버지기는 장독 곁에 두었는데 이는 가까이 우물이나 펌프가 있었기 때문이다.

농촌의 3, 4월은 농사는 이미 시작됐지만 아직은 비교적 조용한 시기였다. 이때 쯤 인근 교회서는 잇달아 부흥회를 개최했다. 어느 교회 할 것 없이 5리(里, 2km)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믿는 사람들’은 부지런히 집회에 참석했다. 안강제일교회를 필두로 산대교회, 육통교회, 단구교회, 양동교회는 물론 낙산교(6.25전쟁 때 형산강전투 격전지)곁을 지나 강동교회, 유금교회까지 걸어서 갔다. 서로가 미리 연락해서 가능한 한 겹치지 않게 날짜를 잡은 까닭에 부흥회는 겨울부터 봄까지 내내 계속됐다.

1974년 8월 청천다락원, 김충기 목사 집회를 마치고. 정재용 기자
1974년 8월 청천다락원, 김충기 목사 집회를 마치고. 정재용 기자

‘심령대부흥회’는 보통 월요일 저녁에 시작해서 토요일 새벽에 마쳤는데 새벽 5시, 낮 10시, 밤 7시 하루 세 차례였다. 안강제일교회에 김충기 목사(1932~2019, 부흥사)가 강사로 왔을 때(1969년 3월 24일부터 29일까지)는 인기 절정이었다. 소평교회 교인들은 밤낮으로 적극 참석하고 심지어 새벽기도회에도 가는 이가 있었다. 밤 집회를 마치고 달빛에 논둑을 가로질러 돌아오는 길은 누(들소) 떼처럼 생기가 넘쳤다. 보리밭의 먼지가 풀썩거려도 며칠 전 내린 봄비에 덜 마른 논을 만나도 상관없었다.

같은 해 4월 21일부터 26일까지는 소평교회 차례였다. 청천다락원의 강정란 원장(1918~2007)이 강사였다. 기와집 한 채 규모의 예배당은 입추의 여지가 없어서 다른 교회서 온 사람들은 바깥에 서서 들어야 했다. 전기가 들어오기 전이라 온전히 여성의 약한 육성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는데 ‘상록수’ 소설의 샘골교회에 공부하러 몰려든 아이들처럼 창문에 다닥다닥 매달려서 귀를 기울였다. 이 부흥회를 인연으로 많은 교우들이 매년 여름이면 팔공산 초례봉 기슭에 있는 청천다락원 집회에 참석했다. 한 주간 밥 해 먹을 쌀부대와 반찬을 들고, 대구선 열차편으로 청천역에 내려, 산길 7km를 걸어서 갔다.

24일 목요일 저녁부터 금요일은 종일 비가 내렸다. 봄비치고는 많은 비에 마을 안길은 ‘시북구디(수렁)’가 됐다. 마을 터가 원래 논이었으므로 자갈을 갖다 부었는데도 소용이 없고 오히려 흙에 박혔던 자갈이 배수로로 흘러들어 ‘도깡(도관)’을 막았다. 발 디딜 곳을 찾아 징검다리 뛰듯 건너다가 꾼들거리는 돌에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옷을 적게 버리면 “미꾸라지 잡았다” 하고 크게 넘어지면 “메기 한 마리 잡았다”며 한바탕 웃었다. 금요일 새벽, 강단에 올라선 강 원장은 “이 마을이야 말로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살겠다”해서 좌중을 웃겼다. 합덕수리민속박물관(충남 당진 소재)에 가면 “합덕방죽에 줄남생이 늘어앉듯” 속담과 더불어 이 속담이 전시 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합덕지역은 삽교천 부근의 내포평야 지대로 땅이 비옥하다. 합덕수리민속박물관의 속담 전시물 중 일부. 정재용 기자
합덕지역은 삽교천 부근의 내포평야 지대로 땅이 비옥하다. 합덕수리민속박물관의 속담 전시물 중 일부. 정재용 기자

앞거랑과 큰거랑 둑은 날로 푸르러가고 여자 아이들은 거랑 둑을 다니며 돌미나리, 뺍짜구(질경이), 씬냉이(씀바귀) 등 나물을 뜯었다. 봄비를 맞은 쑥은 흙먼지를 씻고 봄바람에 이파리를 나풀거렸다. 고사리 같이 작은 손으로 고사리 같은 해쑥을 뜯어 ‘털털이(쑥과 밀가루를 버무려서 찐 떡)’를 해 먹고, 부모님이 안강 장날에 가자미 두어 마리라도 사오는 날이면 물을 ‘백철 솥’ 가득 부어도 좋았다. 알맞게 퍼진 보리밥을 가자미쑥국에 말아 일곱 식구 모두 배꼽이 불거지도록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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