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세한도(歲寒圖), 추사 김정희가 제자에게 그려 준 우정의 수묵화
(9) 세한도(歲寒圖), 추사 김정희가 제자에게 그려 준 우정의 수묵화
  • 오주석 기자
  • 승인 2020.05.04 21:43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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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가 무슨 그림일까?
세한도에 그려진 참 뜻은...
세한도가 우리 곁에 있기까지의 풍파

◆세한도가 무슨 그림일까?

'세한도'는 조선 후기의 학자 추사 김정희가 그린 그림이다. 전문 화가의 그림이 아니라 선비가 그린 문인화의 대표작으로 인정받아 대한민국 국보 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세한도] 김정희(金正喜, 1786~1856), 1844년, 종이에 수묵, 27.2×69.2㎝, 국보 제180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보 제180호 세한도. 김정희(金正喜, 1786~1856), 1844년 작, 종이에 수묵, 23×69.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소나무 한 그루. 잣나무 세 그루. 집 한 채. 배경도 없고, 화려한 색채도 없이 황량한 데다 한기마저 느껴지는 이 그림이 추사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이다. 추사 김정희는 왜 이리도 쓸쓸한 그림을 그린 걸까?

조선 최고의 명필로 이름 알려진 추사 김정희. 사실 김정희는 붓글씨뿐 아니라 감상, 문장력까지 뛰어난 천재 중의 천재였다. 그는 효명세자의 스승으로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청산하고 위태로운 조선 후기 사회를 바로 세우려는 개혁가이기도 했다.

게다가 김정희는 ‘조선 최초의 한류스타’였다. 당시 청나라에는 '금석학'이라는 학문이 유행했다. 금석학이란, 금석(비석)에 새겨진 명문을 해석하는 학문으로 청나라 대표학자 '옹방강'과 교류하며 금석학을 익힌 김정희는 북한산에 있는 비석의 정체를 발견해낸다. 그 비석의 정체는 바로 ‘진흥왕순수비’였다.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북한산 진흥왕순수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그때부터 청나라에서는 ‘진흥왕순수비’를 밝혀낸 '김정희'에 대해 열광하기 시작한다. 청나라 연경(베이징)의 지식인들은 김정희와 교류하기를 희망했고, 김정희가 쓴 글을 기다렸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1840년, 영원할 것만 같던 그의 시대가 저물고 만다. 김정희를 믿고 지지해주던 효명세자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안동 김씨 세력은 김정희에게 대역죄를 뒤집어씌운다. 안동 김씨 가문은 그 전부터 김정희를 견제하고 있었다. 대역죄인으로 몰린 김정희는 끝내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평생 고생이란 걸 모르고 살았던 김정희에게 제주도에서의 유배 생활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끊임없이 풍토병에 시달렸고, 음식과 의복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을 거듭했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유배살이를 한 적거지. 오주석 기자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유배살이를 한 적거지. 오주석 기자

김정희가 받은 형벌은 유배형 중에서도 가장 무겁다고 알려진 위리안치형이었다. 집을 가시 울타리로 둘러싸 집 바깥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울타리 안쪽 작은 집 안만이 김정희에게 허락된 공간의 전부였다. 국내를 넘어 해외를 넘나들었던 그에게 그 공간은 너무나 좁고 답답했을 것이다.

제주도에 있는 추사유허비. 오주석 기자
제주도에 있는 추사유허비. 오주석 기자

고난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유배 생활을 하던 중, 김정희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이 김정희 곁을 떠난다. 절친한 친구 김유근, 그리고 부인 예안 이씨가 유배 생활 중 세상을 떠났고, 한양의 친구들 또한 점차 소식이 끊어진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김정희.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한 줄기 빛이 있었다. 바로 제자 '이상적(李尙迪,1804~1865)'이었다. 통역관이었던 이상적은 중국에 갈 때마다 최신 서적을 구해서 김정희에게 보냈으며 청나라의 최신 학문과 동향을 전해주었다.

대역죄인으로 몰려 귀양 간 김정희에게 지극 정성으로 책을 보냈던 이상적, 김정희는 그 이상적에게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붓을 들었다. 1년 중 가장 추운 날에 세한(歲寒)을 그린 그림, 세한도! 김정희는 가장 추운 날을 그려 제자 이상적에게 고마움을 전한 것이다.

세한도 상세부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세한도 상세부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세한도에 그려진 참 뜻은...

‘세한도’ 밑으로 찍힌 인장의 글씨는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고 적혀 있다. 장무상망(長毋相忘)의 뜻은 “오래도록 잊지 말자.”이다.

세한도에 날인된 인장의 글씨 장무상망(長毋相忘)'오래도록 잊지 말자',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세한도에 날인된 인장의 글씨 장무상망(長毋相忘). '오래도록 잊지 말자'는 뜻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추운 날이 되고 나서야 느낀 따뜻한 정. 추사 김정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진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어쩌면 이 그림은 추운 그림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그림일지도 모른다.

‘추운 계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게 남아 있음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라는 공자의 명언을 주제로 삼아 겨울 추위 속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청청하게 서 있는 모습을 화폭에 담아낸 것이다.

추사에게 세한도를 선물받은 이상적은 뛸 듯이 기뻐하며 그림을 청나라로 가져가 청나라 학자에게 선보였다. 추사의 세한도를 보고 감동받은 청나라 학자 16명은 찬사의 글을 남겼다. 또 오세창. 정인보. 배관기 등 후대의 인물들도 찬시를 더했다.

세한도 그림과 발문.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세한도 그림과 발문.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그래서 세한도 그림은 폭 23cm이고 길이가 약 70cm인데, 왼쪽 부분에 붙은 발문의 길이는 무려 13m가 넘는다.

추사의 7년 유배지였던 제주에 가면 세한도의 그림과 같은 단출한 추사관을 만날 수 있다.

'추사기념관'이 제주도에 있는데 세한도 그림을 토대로 건립했다. 오주석 기자
'추사기념관'이 제주도에 있는데 세한도 그림을 토대로 건립했다. 오주석 기자

◆세한도가 우리 곁에 있기까지의 풍파

세한도는 이상적 사후에 민씨 일가로 넘어갔다가 경성제국대학의 중국철학 교수로 고미술 수집가이자 완당 연구학자였던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의 손에 들어갔다. '후지츠카'는 완당의 서화나 그에 대한 자료를 매우 많이 소장하고 있었는데 서예가 손재형(孫在馨, 1902~1981)이 그에게 간곡하게 부탁하여 세한도를 무상으로 양도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손재형이 세한도를 양도받고 난 석달 뒤인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으로 '후지츠카'의 서재가 모조리 불타버리면서 그가 수집한 완당의 수많은 작품들도 함께 사라졌다고 한다. 그야말로 운명적으로 살아남은 작품이라고 하겠다.

손재형 선생은 정치에 투신해 재산을 탕진하자 고리대금업자에게 세한도를 담보로 맡겼는데 돈 갚을 길이 없자 세한도의 소유권을 포기했다. 그래서 이 작품을 개성 출신의 갑부 손세기가 사들였고 그의 아들인 손창근이 대를 이어 소유하고 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하였다.

* 아래는 세한도 제발문 중에서 추사가 제자 이상적에게 쓴 글을 발췌하였다.

“작년에는 만학집과 대운산방 문고 두 책을 보내주더니, 올해는 또 황조경세문편을 보내주었다.”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고 했네. 그대가 나를 대함이 귀양 오기 전이나 후나 변함이 없으니 그대는 공자의 칭찬을 받을 만하지 않은가?”

간송 전형필이 모사한 세한도. 간송미술관 소장
간송 전형필이 모사한 세한도. 간송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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