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 산책] 정아은 '전두환의 마지막 33년'
[장서 산책] 정아은 '전두환의 마지막 33년'
  • 김대영 기자
  • 승인 2023.06.11 15:2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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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왜 무릎 꿇지 않았는가

저자 정아은은 1975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엔 은행원과 컨설턴트, 통·번역가 등 다양한 직업을 거쳤다. 2013년, 잦은 이직 경향과 경쟁분위기에서 생존해야 하는 현대인들의 생활상을 담아낸 장편소설 《모던 하트》로 제18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 책에서 저자는 2021년 11월 23일 세상을 떠난 전두환의 삶과 그를 끝내 단죄하지 못했던 대한민국의 근원적 모순을 분석하고 있다. 목차는 ‘프롤로그, 1부 영광(1931-1980), 2부 모순(1981-1987), 3부 몰락(1988-2021), 4부 악의 기원, 에필로그’로 되어 있다.

책의 내용을 보면, 1부는 전두환의 기질적인 씨앗이 싹튼 그의 성장기부터 1979년의 12·12 쿠데타, 1980년 5월의 광주를 거쳐 그가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자로 집권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2부에서는 전두환이라는 무법자가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 기정사실화 되고, 어떤 이들에겐 아직도 ‘단군 이래의 최대 호황’이란 시절로 기억되는 그의 집권기, 1980년대에 관하여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 책의 3부는 그가 대통령직을 내려놓은 이후부터 2021년 죽음을 맞이한 날까지의 여정을 고찰하고 있다. 책의 마지막 4부에서는 1부에서 3부까지 전개되었던 전두환이라는 문제적 인물이 어떻게 대한민국에서 집권할 수 있었고, 단죄받지 않고 생을 마감할 수 있었으며, 결국 그가 우리 사회에 남긴 깊은 상흔과 족쇄가 무엇인지를 총체적으로 되짚고 있다.

책의 내용을 종합하면, 저자는 전두환을 광주 시민을 학살한 살인마로 규정하고, 박정희, 김영삼, 김대중 등과 비교하면서 그의 성격을 분석하고, 언행을 비판하고, 전두환이 통치하던 시대를 해석하는데 대부분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기자는 전두환의 성장 과정과 집권 중, 퇴임 후의 행적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중점을 두고 책을 읽었다.

1. 어린 시절

전두환의 어린 시절은 가난으로 뒤덮여 있었다. 고향인 합천 시골 마을에서의 삶도 가난했지만, 갑작스럽게 만주로 이사하게 되면서 더욱 가난해졌다. 낯선 만주 땅에서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온 가족이 땅을 갈고 흙을 고른 끝에 겨우 살 집을 마련할 무렵, 전두환의 가족들은 다시 조선 땅으로 돌아왔다. 화재로 만주 집이 전소된 데다가 그 충격으로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어머니가 고향 땅에 돌아가고 싶다고 읍소했기 때문이다.

고국으로 돌아온 전두환 가족은 대구에 자리잡았다. 아버지는 막노동을 나갔고, 열 살이던 전두환은 약전골목에서 약 배달을 했다. 쌀밥은 고사하고 보리죽이나마 하루 두 번 먹을 수 있으면 다행인 나날이었다. 말년에 쓴 회고록에서 전두환은 온몸에 짚이 묻어 있어 동네 아이들에게 ‘움막집 아이’라고 놀림받았던 이 시절을 “끼니를 이을 수도 없다 보니 내 몸은 수척했고 키도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라고 기술한다.

갑작스러운 만주로의 이주는 아버지에게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다. 전두환의 아버지인 전상우(全相禹)는 가난하지만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이 높은 ‘한학자’였다. 마을에서 ‘읽고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재였던 그는 마을의 구장 일을 맡고 있었는데, 일본인 순사와 크고 작은 일로 갈등하다가 결국 잡혀갈 위기에 처했다. 급기야 출두명령서가 집으로 날아들고, 며칠 뒤 좁은 산길에서 일본인 순사와 마주친 전상우는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순사)의 허리춤을 잡고 번쩍 들어 강둑으로 밀쳐버렸다.

5남매를 낳았지만 아들 둘을 잃고 딸만 셋을 키우던 전두환의 어머니 김점문(金点文)은 아들을 갖기 위해 노심초사하다가 한 스님에게서 “앞니가 잘못 나 있어 아들을 낳아도 지니지 못한다.”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김점문은 그 자리에서 바로 자신의 앞니 두 개를 빼버린다. 생니를 뺀 뒤 심하게 앓은 김점문은, 남아 있는 치아마저 흔들리는 바람에 치아를 모두 잃고 ‘합죽이’가 되는 운명에 처한다.(40~42쪽)

2. 성장 과정

전두환의 성장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그가 적령기를 놓치고 열 살이 되어서야 소학교에 입학했다는 부분이다. 어려운 집안 사정 때문에 서당에서 한학을 익힌 것이 전부였던 전두환은 만주에서 처음 ‘학교’에 가게 되었다. ‘호란보통소학교’에 입학한 것이다. 전두환은 집안일을 돕고 농사일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어렵게 시작한 낯선 땅에서의 학업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대화재와 어머니의 실명으로 1년 3개월 만에 만주 생활을 접고 조선 땅으로 돌아온 이후 전두환은 약배달을 하고, 물지게를 지고, 땔감을 해 오느라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다시 학교에 다니게 된 것은 열네 살이 되던 해 4월로, 그는 희도공립국민학교에 4학년 학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전두환은 대구공업중학교와 대구공업고등학교를 거쳐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한다. 합격자 228명 중에 226등의 성적으로 겨우 입학에 성공한 그에게 육사의 교육 과정은 벅찰 만큼 어려웠다. 제대로 된 초·중등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대학 과정의 수준을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수학을 잘하는 친구에게 개인 지도를 받거나, 취침 시간에 몰래 빠져나와 화장실에 가서 공부하는 등 악바리처럼 노력해 정규 과정을 소화한다.

육사를 마친 뒤 그의 군인 경력은 탄탄대로였다. 졸업 뒤에는 미국 포트 브랙 기지의 심리전 학교에서 심리전 과정을 이수하고, 미 육군 보병학교의 레인저 과정과 패스파인더 과정을 이수해 특수전 전문가로 거듭난다. 한국에서 7~8명만 선발해 대표로 보내는 과정에 선발되어 미국 유학에 갔으니, 꼴찌에서 두 번째로 들어간 육군사관학교에서 그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그의 성장 과정은 한마디로, 상승을 위한 끈질긴 집념이 펼치는 강렬한 드라마였다.(43~45쪽)

3. 집권기의 경제 정책

1980년 9월, 대통령에 취임한 전두환은 김재익을 경제수석비서관으로 등용해 파격적인 권한을 주었다. 김재익은 1970년대에 경제기획원의 경제기획관과 기획국 국장을 지낸 ‘안정화 시책’의 핵심 입안자이자 브레인이었다. 경제수석비서관 자리를 제안받은 김재익이 “저의 정책을 추진하시면 엄청난 저항에 부딪힐 텐데 그래도 끝까지 제 말을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수락 조건을 밝혔을 때 “여러 말 할 것 없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했다는 일화가 보여주듯, 전두환의 김재익에 대한 신뢰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격적인 종류였다.

이는 전두환이 사람을 기용할 때 자주 보여주었던 특성으로, 그는 한번 신임한 사람에게 통째로 일을 맡긴 뒤 끝까지 믿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김재익이 실질적 의미의 경제 사령탑이 된 이후, 대한민국 경제는 정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방향을 선회하게 된다. 김재익이 주도하고 강경식, 김기환 같은 경제기획원 출신 인재들에 의해 뒷받침된 새로운 시책의 핵심은 ‘소수가 내리는 비합리적인 결정에서 집단지성을 통한 합리적인 결정으로의 변환’이었다. 정권이 교체됨과 함께, 뛰어난 경제 관료들의 두뇌에서 나오는 통찰력으로, 또한 그 통찰력을 알아본 리더의 전권 위임으로, 대한민국 역사상 한 번도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던 시장 경제의 원리가 비로소 실현되었다.

안정화 시책의 대표 주자였던 김재익이 5공 정권에서 활약했던 시기는 국보위 경제과학분과위원장으로 일했던 1980년 6월부터 버마 아웅산 묘소에서 희생당한 1983년 10월까지, 3년 4개월에 불과하다. 김재익이 전두환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정권 초반 3년 동안 대한민국은 탄생 이후 처음으로 물가안정을 이루고, 일관된 규칙하에 공정한 경쟁을 펼칠 수 있는 안정적인 시장경제 체제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이후에 대한민국이 갈팡질팡하면서도 큰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탄탄한 경로를 설정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138~141쪽)

4. 감옥 안의 삶

전두환을 이루는 또 하나의 핵심 특성은 수감 생활의 후반부에 흘러나온다. 재판이 끝난 뒤 수감 생활에 적응해 나가면서, 그는 살아있는 동안 한 번도 잃은 적이 없었던, 그를 이루는 것 중 가장 강력하고 뛰어난 특성을 선명하게 드러내는데, 그것은 근면함,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근면함이었다.

그는 한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운동 시간이 돌아오면 제한된 공간에서나마 움직여 몸을 단련했고, 호실에 갇혀 있을 때는 책을 읽거나 편지를 썼다. 그가 읽었던 책은 두 종류였다. 하나는 《한비자》, 《조선왕조실록》, 《강대국의 흥망》, 《한국의 통일정책》 같은 정치‧역사 관련 책이었고, 다른 하나는 《걸리버 여행기》, 《엄지 왕자》, 《아서 왕의 모험》 같은 이야기책이었다.

그가 군인이고 정치인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전자의 책들을 즐겨 읽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특이한 건 《걸리버 여행기》 같은 동화적인 성격을 띤 책을 읽었다는 점인데, 그는 이 책들을 손자‧손녀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소스로 삼기 위해 읽었다. 회고록에서 그는, 자신이 감옥에 있는 동안 손자‧손녀들이 옛날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할 때마다 이야기 밑천이 부족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부지런히 옛날이야기들을 읽어 내용을 기억하려 애썼다고 설명한다. 또한 그는 직접 만날 수 없는 손자‧손녀들에게 잊히지 않기 위해 매일 편지를 썼다. 월요일은 손자, 화요일은 손녀, 수요일엔 자녀들…. 이런 식으로 요일을 정해놓고 번갈아 가며 썼다.

전두환은 감옥 생활이 자기에게는 전혀 힘들지 않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 움막집에서 살며 의식주의 부족과 불편함에 단련이 되었고, 육사 생도 때와 군인으로서 했던 병영 생활, 미국 연수 때 혹독한 생존 훈련을 거쳤기에 감옥에서의 생활이 힘들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두환은 생의 어느 순간에도 허투루 임하지 않았다. 늘 운동으로 몸을 단련했고, 맡은 일을 열정적으로 해냈으며, 처한 상황을 기민하게 살폈다. 그러다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기회가 오면 재빨리 낚아챘다. 필요성을 느끼면 전문가를 초빙해 왕성한 학습력으로 목표한 지식을 익혔고, 항상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엄청난 생명력으로 자신에게 부여된 하루하루를 살았다.(244~246쪽)

5. 전두환을 단죄하지 못한 이유

퇴임 후 33년 동안 전두환은 왜 무릎 꿇지 않았던가? 우리 사회는 왜 그를 무릎 꿇게 하지 못했는가? 전두환이라는 명확한 ‘악’을 단죄하는 일에, 누구도 사익(私益)을 희생하며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치인이 악을 처단할 것을 줄기차게 주장하고, 국회의원이 처단되지 못한 거대 악을 단죄하기 위해 입법을 하고, 검사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치명적인 범죄를 저지른 이를 집요하게 추적해 법정에 넘겼다면, 그에 대해 판사가 바른 판결을 내렸다면, 전두환은 제대로 된 단죄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 김영삼과 김대중은 전두환 처벌을 제 정치적 손익에 따라 이용했고, 국회는 전두환에 대한 행정부 수반의 ‘이용 의지’에 따라 법을 만들거나 만들지 않았으며, 검사 역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고 불기소처분을 했다가 몇 개월 뒤 행정부 수반의 의지에 따라 다시 기소를 단행하는 촌극을 벌였다. 한국 사회의 결정권을 쥔 자리에 있는 누구도, 의지를 갖고 전두환을 단죄하려 하지 않았다. ‘선’을 지키기 위해 직(職)을 걸고 나선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셈이다. 군인이 자국 국민을 학살하는 참극이 벌어지게 만든 희대의 무법자가 제대로 단죄받지 않고 남은 생을 풍요롭게 보내다 이승을 하직하는 광경은 이렇듯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소중하게 지켜가는 ‘일정 선’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데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358~359쪽)

전두환을 읽어내는 일은 한국을 읽어내는 일이고, 자신을 정확하게 읽어내는 국민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의 육신이 떠난 지금, 그의 존재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고, 그가 한국사의 정확한 자리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그리하여 존재했던 한 인물의 행적을 우리 사회 발전의 불쏘시개로 삼을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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