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답사 1번지' 강진에서 근대문학의 향취와 다산 정약용에 취하다
'남도 답사 1번지' 강진에서 근대문학의 향취와 다산 정약용에 취하다
  • 강지윤 기자
  • 승인 2022.07.08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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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이 유배되어 살았으며 실학이 집대성된 장소
'백련사 동백길'과 우리나라 순수문학의 뿌리를 내리게한 '시문학파 기념관'과 '영랑생가'를
만나는 곳, 전남 강진
여름 휴가를 즐기기에도 최적
만덕산 기슭에 자리 잡은 백련사 누각 사이로 멀리 강진만이 내려다 보인다.  강지윤 기자
만덕산 기슭에 자리 잡은 백련사 누각 사이로 멀리 강진만이 내려다 보인다.
강지윤 기자

유홍준의 베스트셀러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를 통해 ‘남도 답사 1번지’로 알려진 강진은 전라남도의 서남쪽 끝 소백산맥이 두갈래로 갈라져 남해에 닿은 강진만을 끼고 있다. 탐진강과 금강이 합류하며 이루어진 충적평야와 강진만을 중심으로 청정수역에서는 수산업이 활기를 띤다. 또한 도자기의 원료인 고령토가 풍부하고 도자기를 구울수 있는 자연적 조건을 갖추고 있어 예로부터 고려청자 도요지가 광범위하게 산재해 있었다. 그러나 강진을 찾는 많은 사람은 정약용이 유배되어 살았으며 실학이 집대성된 장소인 ‘다산초당’이나 ‘백련사 동백길’, 그와 함께 우리나라 순수문학의 뿌리를 내리게 한 ‘시문학파기념관’과 ‘영랑생가’ 등을 많이 찾는다. 여름휴가로 시원한 바닷가 물놀이만 고집하지 않는다면 ‘남도 답사 1번지’ 강진에서 소소한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

-영랑 생가

모란이 피기까지는 한 해를 더 기다려야겠다.  강지윤 기자
모란이 피기까지는 한 해를 더 기다려야겠다. 강지윤 기자

정겨운 남도 사투리로 현대 서정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김윤식. 영랑이라는 이름이 조금 낯설어도 청소년기 국어 교과서에 실린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테요...’로 시작하는 시를 모르는 이는 드물 것이다.

영랑은 김윤식의 아호로, 1903년 그가 태어나 자란 생가를 보수하여 원형을 되살려 놓았다. 1948년 영랑이 서울로 이사한 후 사유지였으나 강진군이 매입하여 원형을 복원하여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본채, 사랑채. 문간채등 3동으로 이루어져 있는 소박하고 정갈한 한옥을 둘러보고, 영랑의 시혼과 발자취를 느끼며 대나무숲 사이 계단을 오르면 세계모란공원이 보인다.

모란이 만개하는 봄날이면 가장 찬란한 장소이겠지만 집 뒤 산책로를 10여분 걸어내려 오다 보면 왼편에 ‘시문학파기념관’이 보인다.

-시문학파기념관

시인들은 그렇게 빼앗긴 나라의 말과 글을 다듬고 길러왔다.  강지윤 기자
시인들은 그렇게 빼앗긴 나라의 말과 글을 다듬고 길러왔다. 강지윤 기자

‘시문학파’란 1930년대 순수시 운동을 주도했던 문학동인회 명칭이다. 그 시대를 풍미했던 카프문학이나 모더니즘에 휩쓸리지 않고 이 땅에 순수문학의 뿌리를 내리게 한 모태가 되었다. 참여했던 동인으로는 영랑 김윤식, 수주 변영로, 정인보, 신석정 등 9명이다.

‘시문학파기념관’은 특정 작가에 한정되지 않고 한 시대의 문예사조를 조망하는 문학공간으로서 9명 작가들의 육필원고와 유물, 저서, 1920~1960년대 출판된 희귀도서 500여권 등 5000여종의 문학 관련 서적이 소장되어 있다. ‘2017대한민국 최우수 문학관’으로 선정 되었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시를 읽으며 잠시 쉬어갈수 있는 북카페도 있다.

시문학파 시인  9명의 육필 원고와  희귀본,잡 초판본 등 귀중한 자료가 잘 정리돼 있다.   강지윤 기자
 

시간 여유가 있다면 영랑 생가에서 5분 정도 거리에 있는 ‘강진 미술관’과 ‘사의재’를 둘러보는 것도 좋다. 다산이 강진에 유배되어 머문 첫 거처다. 주막집 주인의 배려로 골방 하나를 얻어 생각과 용모, 말과 행동을 바르게 하자는 뜻으로 ‘사의재’라 이름짓고, 제자를 기르고 학문연구에 헌신키로하며 4년간 머물렀던 곳이다.

-다산초당

'다산초당' 의 지붕이 지금은 기와로 덮여 있다.  강지윤 기자
'다산초당' 의 지붕이 지금은 기와로 덮여 있다. 강지윤 기자

강진으로 유배온 7여년간 다산은 주막이나 제자의 집에 머물렀다. 1808년 봄 정약용은 해남 윤씨 집안의 산정(山亭)에 갔다가 아늑하고 조용하며 경치가 아름다운 이곳에 머물고 싶었다. 마음을 전하자 윤씨 집안은 이를 흔쾌히 허락했다.

이곳에서 정약용은 비로소 안정을 찾고 후진 양성과 저술에 몰두했다. 10년동안 18명의 제자를 길러내고 그들과 함께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등 5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집필했다. 제자들은 스승의 지시에 따라 자료수집, 정리, 정서, 편집 등의 작업에 참여하고 다산은 각종 저작을 집필하며 제자들을 능력별, 수준별로 지도했다.

산정(山亭)은 ‘다산초당’으로 거듭났고 유배객의 쓸쓸한 거쳐가 아니라 선비가 꿈꾸는 이상적인 공간이자 활기찬 학문의 현장이 되었다. 초당의 좌우로 동암은 다산이 기거하며 집필하던 공간이며 서암은 제자들이 기거하던 곳이다.

-다산박물관

'다산박물관입구'에 당시 모습을 재연해 두었다.  강지윤 기자
'다산박물관입구'에 당시 모습을 재연해 두었다. 강지윤 기자

다산 정약용(1762,영조38년~1836,헌종2년)은 경기도 남양주 조인면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아버지 정재원과 어머니 해남 윤씨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4세때 천자문을 배우고 10세때 자작 시집을 낼만큼 총명했다. 1789년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 문신을 거쳐 여러 벼슬을 지냈다.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수원화성을 설계하고 배다리, 거중기 설계등 실학자로서도 왕성한 면모를 보이다 정조 사후 천주교 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를 가게된다.

강진에서의 18년 유배생활을 학문연구와 저술활동으로 승화시켜 500여 권의 방대한 저술활동을 했다. 해배이후 고향으로 돌아간 다산은 저작을 총정리한 여유당집을 완성하고 1836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

다산 박물관은 그의 출생부터 성장, 관직생활, 유배생활, 해배이후의 저술활동 등 다산의 삶을 시기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로서 그는 시대의 문제점을 정확히 판단하고 ‘실용’과 ‘실천’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남편으로 아버지로 가족에게 보내는 절절한 마음이 담긴 ‘하피첩’등 다산의 인간적인 면모도 충분히 이해하고 살펴볼 수 있다.

다산초당 뒷쪽으로는 동백나무와 차나무 우거진 등산로가 1km 정도 뻗어 백련사로 이어진다. 길을 걸으며 다산과 백련사 주지 혜장선사의 일화가 떠오른다. 첫 만남때 ‘주역’을 놓고 밤새 대화를 나누고 이때 혜장선사는 큰 깨달음을 느꼈다고 한다. 다산은 마음이 울적할때면 다산초당 뒷길을 따라 백련사로 넘어가서 혜장과 격의없이 논어, 맹자, 주역을 이야기하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6년뒤 혜장이 세상을 먼저 떠나는데, 다산에게 혜장은 외로운 귀양살이를 잠시나마 잊게해준 귀한 벗이었다. 이백여 년 전 그들이 오갔을 동백숲길을 걸으며 그들의 우정을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