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카페 프라하의 '서양미술사 수업'
부산, 카페 프라하의 '서양미술사 수업'
  • 강지윤 기자
  • 승인 2024.02.01 13: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매월 셋째주 수요일 오후 부산 카페 프라하
카페 안은 날씨 무색· 열기로 달아올라
카페 프라하에서 만난 자매. 정승원(왼쪽부터), 혜순 씨. 강지윤 기자
카페 프라하에서 만난 자매. 정승원(왼쪽부터), 혜순 씨. 강지윤 기자

카페 프라하

부산역에서 다대포행 지하철 1호선을 타고 4번째 토성역에서 5분 거리, 구덕로 한적하고 좁다란 골목길에 접어들면 노란색으로 페인트칠한 독특한 나무 현관이 나타난다. 눈을 들면 현관 모퉁이에 ‘Praha’라 적힌 작은 철제 간판이 수줍게 달려 있다. 눈에 띄지 않는 간판이 미안한지 조그만 현관문 옆에 놓인 흑판에 카페 프라하 월~금 AM11:00~PM7:00 라 씌어있다. 문을 밀고 들어서면 메뉴판도 소박하다. 24시간 고아 만든 대추차와 사과· 당근을 착즙한 주스와 아메리카노와 카페라테 정도다. 뚜껑 달린 칠기에 담겨 나오는 대추차 옆에는 굽다리 접시에 견과류 한줌도 따라 나온다. 몸을 따뜻이 데워주는 대추차를 마시며 주위를 둘러본다.

문밖에서 보이던 풍경이 그대로 안의 풍경으로 연결된다. 이 오래된 이층집의 주인이자 카페 프라하를 운영하는 사람은 2년 전 동주여전(현재 ‘부산보건대학교’)을 정년퇴직한 정승원(67) 교수다. 이곳은 그녀의 부친이자 학교법인 동주학원 초대이사장인 석파 정종섭 선생이 젊은 시절 변호사로 활동하던 때, 사무실이 있던 곳이다. 마침 체코의 프라하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그의 아들이 카페를 열면서 지은 이름이 ‘프라하’다. 그 후 아들이 다른 지역으로 가며 카페는 문을 닫았다. 코로나가 끝난 작년 3월, 닫아 두었던 카페의 문을 정승원이 다시 열었다. 2024년 2월 정년퇴직을 앞둔 동생 정혜순(65) 교수도 적극 찬성하고 나섰다.

두 자매는 카페를 좀 더 의미 있는 장소로 활용하고 싶었다. 관심은 있었지만 바쁜 일상에서 미처 해보지 못한 일, 또한 많은 이가 함께할 수 있는 일. 동생 정혜순은 미술사에 생각이 미쳤다. 그녀가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던 공부였다. 의외로 기회는 빨리 왔다. 서울 사는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경주를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 경주로 여행 온다는 소식이었다. 마침 경주에 시골집이 있던 정혜순도 합류했다. 셋이 함께 하룻밤을 묵었다. 그때 어울린 이가 이종연이었다. 이종연(65)은 미술관 경영을 전공한 예술학 석사로 오랫동안 서울에서 전문강사로 활동하는 중이었다. 그 자리에서 정혜순은 카페 프라하에서 한 달에 한 번 미술사 강의를 하면 어떻겠냐고 이종연에게 제안했다.

카페에서 열리는 미술사 강의

매월 셋째주 수요일 오후 4시가 가까워지면 카페 프라하엔 연배가 비슷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이 시간만은 일반 손님이 없다. 반가운 인사들이 오가고, 크지 않은 공간은 손님들로 가득해진다. 탁자와 의자가 모두 정면을 향하고 한 뼘 높은 정면의 단상엔 커다란 TV 한 대, 그리고 피아노도 놓여 있다. 4시가 되자 마이크를 잡은 정혜순이 반가운 인사말과 함께 오늘의 주제를 소개한다.

새해 첫 강의, 1월의 강의 주제는 ‘트로이 전쟁과 헥토르’. 강의를 하는 이는 이종연 선생님이다. 그녀는 한 달에 한 번, 강의를 위해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온다. 강의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자리를 마련하는 사람의 삼박자가 맞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2024년 1월 강의가 8번째 강의다. '트로이 전쟁'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신화의 흐름을 따라가며 전쟁 속의 인간과 신의 모습 등을 주제로 그려진 작품들을 비교· 감상하며 시대적 사조를 알아가는 방식이다. 강의 중간 들려주는 영상과 한 곡의 노래 또한 몸과 마음을 청량하게 씻어준다. 참석자들은 비슷한 연배의 퇴임 전후의 교수님들, 평생 환자를 돌보다 퇴임을 앞둔 의사 선생님, 조기 퇴직한 교사, 30년 넘게 다도(茶道)로 일가를 이룬 분, 오로지 새로운 공부에 대한 호기심으로 온 분 등 다양하다. 수업은 언제나 성황이다.

석파 정종섭 선생의 흉상(위)과 철필로 깨알같이 씌어진 고등고시 준비 노트. 강지윤 기자
석파 정종섭 선생의 흉상(위)과 철필로 깨알같이 씌어진 그의 고등고시 준비 노트. 강지윤 기자

석파학원과 아버지 정종섭

올겨울 들어 가장 추웠던 날, 부산 보건대학교 ‘석파정종섭기념관’에서 동생 정혜순 교수를 만났다. 올 2월 수십 년 근무했던 학교를 떠나는 그녀가 마지막 보직인 박물관장으로 근무했던 곳이다. 박물관은 ‘학교법인 석파학원’의 산실인 괴정동 소재 캠퍼스 안에 있다. 1995년 개관한 박물관은 10여 년 전부터 정혜순이 박물관장을 맡으며 규모를 키우고 색깔을 입혀 나가게 되었다. ‘학교법인 석파학원’은 1978년 동주여자실업전문학교 6개 학과로 시작하여 2024년 부산보건대학교로 학교명이 바뀌고, 어린이집부터 부속유치원, 동주여중, 동주여고, 부산 보건대학교까지 5개의 교육기관을 갖추고 있다. 박물관 앞에는 설립자 석파 정종섭(1926~2020) 선생의 흉상이 편안한 미소를 머금고 교정을 바라보고 있다.

정승원과 정혜순은 석파학원 설립자 정종섭 선생과 부인 조현민(1928~2013) 여사의 7남매 중 둘째, 셋째 딸이다. 부친 정종섭 선생은 일제강점기인 1926년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태어났다. 자유분방한 소년시절을 보내던 그는 남해공립전수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인 교사로부터 혹독한 노동을 강요당하며, 나라 잃은 국민의 비참한 현실과 자기 삶에 대해 깊이 숙고하였다. 힘없는 설움과 고된 현실을 헤쳐 나가기에는 공부에 전념하는 일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깨달음. 그 후 그는 학업에 무섭게 정진하여 17세에 교원 자격증을 따고 교사가 되어 근무하며 19세에 결혼한다. 신부는 17세의 조현민이었다. 9월의 강제징용을 앞두고 1945년 8월, 조국이 해방되었다.

해방 후의 혼란한 정국에서 그는 교사로서의 미래를 접고 법관이 되고자 하는 꿈을 안고 부산으로 간다. 집안이 송사에 휘말려 뼈아픈 고충을 겪었기 때문이다. 전 재산을 털어 집안이 토지계약을 맺었는데 6·25전쟁 발발로 잔금을 지불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전쟁 후 계약자는 물가 상승을 핑계로 10배의 액수를 요구하며 피를 말리는 송사를 이어갔다. 전쟁을 불가항력적인 사유로 인정하여 승소 판결은 받았으나, 이 일은 사회 정의와 불의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 그는 스스로 법을 배워 “법조인이 되리라”는 각오를 하게 됐다.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 교사직과 법학과정을 이수하며 고시를 준비하는 일은 초인적인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세 번의 시도 끝에 1956년 8월 선생은 제8차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다. 부산지방검찰청에서의 시보로 시작해 검사의 길을 걷다가 변호사가 되었다. 그는 변호사의 길을 걸으며 경영난에 허덕이던 학교법인 동주학원을 인수한다. 이 일로 그는 또 한번 인생의 물꼬를 튼다. 그때의 결심이 오늘날의 ‘석파학원’ 설립으로 이어졌다.

주생활 박물관. 공간의 주인이 살고 있는 것 같다. 강지윤 기자
주생활 박물관. 마치 공간의 주인이 살고 있는 것 같다. 강지윤 기자

어머니 조현민 여사의 작품

부친이 돌아가시고, 몇 년 앞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며 정혜순은 깊은 고민에 빠진다. 아버지가 청운의 꿈을 안고 고등고시를 준비하던 시절의 노트와 그 밖의 많은 자료를 어머니 조현민 여사는 종이 한 장 버리지 않고 고스란히 모아 두었다. 아버지 삶의 족적과 그 길을 향해 혼신을 다한 기록물들은 그대로 현대사를 가로지르는 사료였다. 지나간 시간을 고스란히 묻어 버릴 수는 없었다. 딸이 바라보는 아버지가 아니라 이 시대를 큰 걸음으로 내디디며 길을 낸 인간 정종섭을 기억하기 위해 ‘석파정종섭기념관’을 만들고자 결심했다. ‘무한불성(無汗不成 땀 흘리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이라는 교훈을 몸소 실천하며 살아온 그의 생애와 관련된 자료를 분류하고 정리하며 그는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어머니였다. 17세에 결혼하여 7남매를 낳아 기르고 막내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50세에 서예를 배우기 시작한 어머니 조현민 여사는 한국화를 겸하며 사군자뿐 아니라 호랑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양이 아니라 작품의 수준도 놀라웠다. 신문지를 녹여 풀과 섞어 만든 민속탈, 갖가지 생활 폐기물로 만든 공예작품들….

유품을 정리하며 정혜순은 결심한다. 먼 과거만 소중한 시절이 아니다. 한두 세대가 지나면 오늘 이 시간도 기억 속에 묻힐 것이다. 후대가 타임캡슐을 열어보며 오늘을 살고 간 이들의 삶을 알도록 하자. 그녀는 민속품에도 주목했다. 주생활 박물관을 만들게 된 배경이다. 부모님이 평생 쓰던 안방 장롱과 고풍스런 등나무 소파, 화문석 돗자리, 상형문자로 반야심경을 써놓은 십곡병풍, 첫아들의 배냇저고리(달려있던 저고리 끈은 7남매 입학시험 때마다 조금씩 잘라 속옷에 꿰매는 바람에 없어졌다), 두 분 결혼식 답례품으로 나눠준 수놓은 손수건, 100장이 넘는 기증받은 LP 레코드판, 퇴임하는 교수님이 문중에 보관하고 있다 기증한 오래된 서책들, 학부모가 기증해 온 명기(무덤에 넣는 그릇)와 제기 등. 인간의 삶과 함께했던 물건들은 당시의 가치관과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한 채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면 시간 여행을 한 듯한 느낌이 든다. 먼 과거가 아니라 우리 기억의 끝자리에 희미하게 닿아 있는. 100년이 채 되지 않은 시간, 한국인의 격변기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민속 박물관이었다. 전시를 목적으로 수집한 작품이 아니라 잠시 자리를 비운 누군가가 만지고 쓰던 물건들이 있는 것 같은 낯익은 방. ‘석파정종섭기념관’은 평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 지역주민 누구나 관람할 수 있다.

카페 프라하의 송년회 포스터. 모두 재능을 발휘해 아름다운 송년회를 꾸몄다. 강지윤 기자
카페 프라하의 송년회. 모두 재능을 발휘해 아름다운 송년회를 꾸몄다. 강지윤 기자

벚나무 꽃눈 맺힐 2월 세 번째 수요일이면, 카페 프라하에는 하나둘 강의를 듣는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운이 좋으면 정승원이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난 연말 송년회 때 들은 그녀의 피아노 연주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잔잔한 미소와 정성 가득한 음료 그리고 <서양미술사 수업>을 들으며 모두는 ‘바로크시대의미술’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