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신문왕릉
경주 신문왕릉
  • 이흥우 기자
  • 승인 2021.12.1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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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고구려의 백성들과 융합에 노력
받침석 윗부분에 문(門) 자가 새겨져 있다.
'신문왕릉' 전경 모습. 이흥우 기자
'신문왕릉' 전경 모습. 이흥우 기자

이 능은 신라 제31대 신문왕(681~692년)을 모신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맏아들로 부왕의 뜻을 이어받아 옛 백제와 고구려의 백성을 융합하는데 힘썼다.

신문왕릉 입구 출입문 모습. 이흥우 기자
신문왕릉 입구 출입문 모습. 이흥우 기자

고대 신라의 최고 교육기관인 국학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였고, 귀족들의 기반이 되던 관리들에게 주던 토지에 수조권 및 노동력 징벌권을 부여한 ‘녹읍’을 폐지하고, 관리들에게 지급한 토지에 수조권 및 노동력 징벌권을 주지 않는 ‘관료전’을 지급하였다. 지방을 통치하기 위하여 전국을 9개의 주(州)로 니누고 중요한 거점 5곳에 소경을 설치하였다. 신문왕이 죽은 후에는 낭산 동쪽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신문왕릉 소개 간판. 이흥우 기자
신문왕릉 소개 간판. 이흥우 기자

이 능은 낭산 남쪽 끝자락에 있다. 무덤 가장자리의 둘레들은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5단으로 쌓고, 그 위에 덮개들을 얹었다. 바깥쪽으로 사다리꼴 모양의 석재를 받쳐 놓았다. 정남쪽에 배치한 받침석의 윗부분에 문(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곳이 무덤방으로 들어가는 널길 입구라는 곳을 표시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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