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58)부부싸움 하랴 일하랴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58)부부싸움 하랴 일하랴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1.11.18 1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마니 치다 말고 낫으로 날줄을 그었다. “드드득!”
덕분에 변소 거적문 바꿔

벼는 자라가면서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모판에 볍씨를 뿌려 기른 벼의 싹을 ‘모’라고 하고, 그 모가 모내기를 거치면 ‘벼’가 됐다. 그리고 경주 안강 지방에서는 누렇게 익은 벼를 따로 ‘나락’이라고 불렀다. 이 즈음이면 장날에 오랜만에 아는 사람을 만나 묻는 첫 안부도 “올해 나락 잘 됐능교?”였다. 대화는 ‘나락 베기’와 ‘나락 타작’으로 이어졌다.

농부들은 나락을 베어 ‘무댕기’ 단으로 묶고, 다 베고 나면 아래 논둑으로 날라 ‘바가리’를 쳤다. 한 단씩 어긋맞게 차곡차곡 한 줄로 세워나갔다. 바가리의 나락은 따가운 가을볕과 시원한 바람에 오징어처럼 말라갔다. 바짝 마르면 단의 무게는 반으로 줄어들었다.

이렇게 마르는 동안 바가리는 새와 쥐들의 주요 표적이 됐다. 낮에는 참새와 청둥오리 떼가 달려들어 낟알을 훑고, 밤이면 쥐들이 논둑에 파 놓은 쥐구멍으로 이삭을 물어다 날랐다. 다 말라가는데 비가 내리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가을비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가을장마가 들면 그해 농사는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는 격’이었다. 나락에서 싹이 트면 찧어봐야 ‘싸래기’(싸라기) 천지였다. 싸라기 섞인 쌀은 반값이었다. 나락은 추곡수매가 불가능 했다.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는 골을 타고 보리나 밀을 뿌렸다. 보이는 산은 양동산이다. 정재용 기자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는 골을 타고 보리나 밀을 뿌렸다. 보이는 산은 양동산이다. 정재용 기자

보리갈이를 마칠 때면 나락 단도 거의 말라 있었다. 그러면 곧바로 집으로 실어 들였다. 옛날에는 지게가 유일한 수단이었지만 리어카가 나오면서 소가 없는 집도 한결 수월해졌다. 소달구지가 있는 집은 부잣집이었다. 리어카에 짐을 가득 싣고 고무밧줄로 동여맸다. 그리고 ‘졸업식 노래’의 한 구절처럼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면’ 한 도가리도 금방이었다.

11월 마을의 풍경은 집집마다 높게 쌓인 낟가리였다. 멀리서보면 지붕인지 낟가리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마당의 지대가 높은 퇴비더비 부근에 캄보디아에서 본 앙코르와트의 탑처럼 높이 쌓아올렸다. 맨 꼭대기에는 짚단 고깔을 씌워 비를 막고 참새들이 못 달려들게 했다. 낟가리는 보리갈이가 끝나고 타작할 때까지 그곳에 있었다. 아이들은 그곳을 돌며 술래잡기 놀이를 했다.

타작은 빠르면 10월말부터 늦으면 12월 초순까지 했다. 발로 밟는 탈곡기도 집집마다 있는 게 아니었다. 탈곡기 순서에 맞춰 놉을 들여 나락 단을 타고 타작을 했다. 이틀에 걸쳐 하기 일쑤였다. 타작한 벼는 이튿날부터 멍석을 깔고 볕에 말렸다. 타작한 벼를 ‘우케’라고 했다.

멍석을 있는 대로 나 꺼내서 폈다. 그래도 마당이 남으면 멍석을 빌려다가 깔았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호시탐탐 노리던 닭들이 얼씨구나 하고 달려들었다. “요놈의 달구새끼!” 마루에 걸쳐놓았던 ‘확대’(대나무 장대)가 춤을 췄다. 때로는 닭이 맞아 죽기도 했다. 멍석 바깥으로 튕겨져 나간 낟알을 하나하나 주웠다. 틈틈이 맨발로 멍석으로 들어가서 우케를 저었다. 두발을 질질 끌고 이리저리 다니면 됐다. 빙빙 돌거나 왔다 갔다 하거나 둘 중의 하나였다. 가을하늘이 끝없이 파랬다.

저녁에는 가마니에 퍼 담아 창고에 들였다가 이튿날 다시 말렸다. 그냥 멍석을 반으로 접어 두고 싶지만 쥐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우케를 들이고, 방청소 하고, 요강 씻고, 소죽 쒀 먹이고, 농사일은 매일 해도 본때가 안 나고 그렇다 해서 안 하면 또 안 되는 일의 연속이었다. 설말리면 기계가 고장 난다고 정미소에서는 받아주지를 않았다. 찧어도 싸라기 쌀이 됐다. 추곡수매용은 한층 까다로웠다.

잘 말린 벼는 가마니에 넣어 곳간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정미소로 갖고 나가 찧었다. 소평마을 사람들은 주로 사거리 부근에 있는 ‘안강정미소’와 북부리에 있는 ‘북부리정미소’를 이용했다. 방아를 찧던 정미소 종업원이 피댓줄에 감겨 올라가 떨어지면서 크게 다쳤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들렸다.

갱빈에 갈았던 콩, 팥 타작도 일이었다. 벼, 보리 일이 끝나도록 축담에 쌓아놓았다가 시간 날 때 타작을 했다. 양이 많으면 도리깨질로 하고 적으면 부지깽이로 두들겼다. 농부들은 비 오기 전에 가을걷이를 마치려고 눈에 불을 켰다.

그해 늦가을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 농부네는 다행히 나락은 이미 ‘고방’(庫房)에 넣은 상태였다. 고방에 넣고도 남은 나락은 멀방 앞에 ‘두지’(斗庋, 뒤주)를 만들어 보관하고 있었다. 두지는 터가 높은 곳에 원모양으로 두툼하게 짚단을 깔고 그 위로 가마니를 둘러 원기둥 모양으로 만들었다. 농부는 밤새 쥐가 구멍을 내지는 않았는지 매일 아침 확인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본채를 남향으로 앉히고, 앞마당의 동쪽은 잿간과 두엄터, 서쪽은 사랑채나 창고였다. 세 칸 건물의 나머지 두 칸은 외양간과 변소였다. 정재용 기자
일반적으로 본채를 남향으로 앉히고, 앞마당의 동쪽은 잿간과 두엄터, 서쪽은 사랑채나 창고였다. 세 칸 건물의 나머지 두 칸은 외양간과 변소였다. 정재용 기자

비 오는 날은 가마니 치는 날이었다. 농부 내외는 하루 종일 가마니를 쳤다. 하루라도 빨리 주인 몫의 두지를 털어 정미소로 갖다 내려는 일념이었다. 어느 저녁 무렵이었다. 지주(地主)가 농부네 집을 찾았다. 대문도 없었다. 불쑥 들어와서는 두지를 한 바퀴 둘러보고 나갔다. 저녁을 먹고 농부 부부는 내키지 않는 맘을 달래 가마니틀 앞에 앉았다. 조용한 가운데 가마니치는 소리만 방안에 가득했다. 이윽고 다 친 전면을 뒤로 돌리고 뒷면의 씨줄을 앞으로 오게 했다. 전신이 뻐근했다.

짚을 먹이던 아내의 대나무잣대가 자꾸 날줄을 벗어났다. 거듭되자 농부가 말없이 바디에서 손을 땠다. 바디를 젖혀주지 않으면 짚을 먹일 수가 없었다. 호롱불이 숨을 죽였다. 뜸을 들이고도 농부는 바디를 잡지 않았다. 아내가 잣대를 던지듯 놓고 일어섰다. 그리고 변소라도 가는 양 밖으로 나갔다.

“이놈의 영감쟁이” 농부는 가마니의 날개를 자르려고 놓아두었던 낫을 집어 들더니 바디 위의 날줄에 갖다 댔다. 새끼줄은 맥없이 잘려나갔다. ‘탱기’(날줄이 긴장을 유지하도록 가마니틀의 양쪽 기둥을 버팀목으로 해서 가로로 친 막대)를 쳤던 작대기가 “텅그렁”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며칠 후 ‘맹모단기’(孟母斷機)의 베처럼 잘려나간 가마니때기는 변소의 거적문으로 걸렸다. 볼일을 보고 나온 여섯 살짜리가 부엌으로 달려가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엄마, 변소 문 새 것이라 너무 좋아!”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