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60)새해 그리고 설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60)새해 그리고 설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2.01.2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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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고 가난해도 행복했던 설
띠(12支)로 나이 따져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우리나라에 ‘태양력’(太陽曆)이 처음 도입된 시기는 고종32년(1895)이다. 그리고 ‘24절기’(節氣)는 인조 22년(1644)에 김육이 중국으로부터 가져와서 10년간 연구 끝에 효종 4년(1653)부터 시행한 것으로 돼 있다.

명(明)나라 숭정(崇禎) 초,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독일인 선교사 아담 샬(Adam Schall, 1591-1666)이 태음력(太陰曆)에 태양력을 원리를 부합시켜 ‘태양력에 따르는 24절기’의 역법(歷法)을 창안했는데 이를 중국이 받아들인 것이었다. 태음력과 태양력을 줄여서 흔히 ‘음력’ ‘양력’으로 부른다.

동지(冬至)는 양력에 따른 것으로 해마다 12월 22일이 일반적인데 4년마다 돌아오는 윤년에는 21일이었다. 최근의 윤년은 2012, 2016, 2020년이었다. 동지가 되기까지 매일 1, 2분씩 짧아지던 해는 동지를 기점으로 길어지기 시작했다. 이를 새해가 새로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동지를 ‘작은설’로 불렀다.

1990년 설날, 마당의 동쪽에 감나무와 두엄더미가 있었다. 정재용 기자
1990년 설날, 마당의 동쪽에 감나무와 두엄더미가 있었다. 정재용 기자

동지 지나고 열흘 있으면 새해(新年)였다. 우리나라가 양력으로 새해를 시작한 것은 순종(純宗)때부터였다. 순종은 “정월 초하룻날 아침의 축하 조회를 양력으로 시행하도록 하라”고 했다. 순종 즉위년인 대한융희(大韓隆熙) 1년(1907)이었다. 그럼에도 백성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음력설로 지켰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부터 명절과 기념일을 양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우리민족에게도 음력설 대신 양력 1월 1일의 ‘신정’(新正)을 강요했다. 사람들은 “양력설은 일본 설 음력설은 우리 설”이라며 저항했다. ‘신정 쇠기’는 정부의 이중과세(二重過歲) 방지 방침에 따라 해방이 되고도 오랫동안 지속됐다. 1970년 신정은 소한(小寒) 엿새 전으로 매우 추웠다. 학교는 방학 중에 학생들을 소집하여 신정식(新正式)을 거행했다.

새해 아침, 해는 양동산의 남쪽에 위치한 양동마을 쪽에서 떴다. 여름에는 양동산의 북쪽 ‘개미콧등’에서 뜨던 해였다. 마을사람들은 국회의원 달력이나 ‘회춘당 약방’에서 얻어 온 한 장짜리 달력에 생일, 제삿날, 명절에 동그라미 표시를 했다. 그리고 밀가루 풀을 쒀서 농짝 옆이나 ‘마꾸리’가 없거나 적은 쪽 벽에 붙였다.

초가집을 지으려면 네 모퉁이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들을 연결하기 위해 횡으로 통나무를 걸치기 마련이다. 농부는 이 통나무에 대못을 밖아 벗은 옷을 걸었다. 이 못을 ‘마꾸리’라고 불렀다. 그리고 구석진 곳 이쪽 벽 마꾸리와 저쪽 벽 마꾸리를 끈으로 연결하여 ‘횃줄’을 만들거나 대나무 ‘횃대’를 달아 옷을 걸었다.

신정을 지나고 한 달여 있으면 음력 정월 초하루, ‘설날’이었다. ‘설’은 인동초(忍冬草)처럼 온갖 어려움 속에도 ‘구정’(舊正) 또는 ‘민속의 날’로 이름을 바꿔가며 살아남았다. 구정이 다가오면 보름 전부터 대목이었다. 엿 고우고, 박상(강정) 만들고, 설 치장(설빔) 기다리는 일로 완전 잔치분위기였다. 1970년 구정은 2월 6일 금요일이었다. 공무원은 9시 정시 출근하고 학생들도 등교했다. 이날 중학생은 오전 10시 반에 등교해서 오후 4시에 하교(下校)했다.

구정의 공휴일 문제는 꾸준히 제기되다가 정부는 1985년 1월 21일 ‘민속의 날’ 공휴일로 지정했다. 그리고 1989년 2월에는 ‘설’로 명칭을 변경했다. 동짓날 새알심으로 나이를 먹듯이 설에는 떡국으로 나이를 먹었다.

거기다가 생일이 되면 다시 ‘만(滿)으로’ 나이를 먹었다. 아이들은 ‘집의 나이’와 ‘호적 나이’는 원래 다른 줄 알았다. 당시는 영아사망률이 높아서 출생신고를 미뤄하기 예사였다. 그래서 흔히 ‘띠’로 따졌다. 태어난 해를 나타내는 열두 지지(地支)를 묻는 것이었다.

안방에 상을 펴고 식사. 우측상단으로 ‘마꾸리’에 걸린 옷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안방에 상을 펴고 식사. 우측상단으로 ‘마꾸리’에 걸린 옷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설이 가까워오면 마을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흥겨웠다. 베이비붐(baby boom, 1955~1963년 출생)에 해당하는 1960년의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은 6.16명이었다. 합계출산율이란 가임여성(15~49세) 1명당 낳은 아이 수를 말한다. 소평마을 역시 집집마다 자녀들이 대여섯 명씩 됐다. 한 학년 두 학급짜리 안강북부국민학교는 교실이 모자라서 저학년은 오전반 오후반 수업을 했다. 1962년생이 졸업하는 1975년 2월 졸업식 때는 2학급 141명이 졸업했다. 그러던 학교가 69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2013년 2월 28일 학생 수 부족으로 폐교됐다. 2021년 8월 25일 통계청 '2020년 출생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은 0.84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로 유일한 0%대 국가였다. 2021년은 출생자보다 사망자가 많은 총인구 감소의 첫해로 기록 될 것이라고 했다.

국민들은 정부보다 현명했다. 정부는 1960년부터 가족계획 정책을 추진했으나 국민들은 “지(제) 복은 지(제)가 타고 난다” “짚신도 짝이 있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며 열심히 아이를 낳았다. 집안에 가면 항렬로 뱃속에 든 할아버지가 있고 외가에는 나이가 적은 외삼촌이 있었다.

설 명절은 ‘있고 없고’ (‘잘 살고 못 살고’를 그렇게 불렀다)를 떠나서 행복했다. 보름여 전부터 대목장이었다. 장을 봐서 ‘바깥 공굴’로 들어오는 농부 내외는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그리며 설한풍에도 추운 줄을 몰랐다. 리어카 안에는 자녀 수 만큼의 ‘돕바’(반코트, topper, topcoat), 떡가래, 돼지고기가 들어있었다. ‘삐삐선’(군용 전화선)을 엮어 만든 ‘가고’(かご, 籠, 바구니)는 온갖 반찬거리로 볼록 했다. “그까짓 농사일, 자식농사가 최고지!” 농부는 커가는 아이들 생각에 어깨를 으쓱했다. 기러기 떼가 석양 속을 줄 지어 날며 “끼룩끼룩” 노래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