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풀 시니어] (126) 이제는 버리고 비우면서 살자
[원더풀 시니어] (126) 이제는 버리고 비우면서 살자
  • 김교환 기자
  • 승인 2021.09.01 1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몇 년 전 노인회 일로 출장 때마다 오가는 길에 자주 모시고 다니던 어른이 있었다. 하루는 꼭 집에 들러서 차 한 잔 하고 가라기에 어쩔 수 없이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나는 깜짝 놀랐다. 조그만 양옥 2층 주택으로 아래층은 창고와 다용도실이고 2층은 거실, 주방, 방 2칸이 전부인데 온통 가구들을 비롯하여 물건들로 꽉 차 있었다. 거실은 겨우 가운데에 찻상 하나 놓을 정도의 공간뿐이었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방에도 낮은 침대 하나 외엔 각종 장식품 등 물건들이다. 경증치매로 작은방 한 칸 차지하고 앉아서 멍청히 바라보고 있는 아내를 두고, 손수 끓여 오는 커피 한 잔 받아드는데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눈앞에 길게 펼쳐진 8폭 병풍이었다. 3년에 걸쳐 제작했다는, 세월의 흐름에 맞춰 살아온 발자취의 진열이다. 초등시절의 통지표, 개근 우등상에서부터 숱한 임명장, 감사장 등과 부피가 있는 상패나 물건을 사진으로 찍어서 수많은 추억이 어지럽게 펼쳐진다.

뒷면은 당신의 솜씨로 정성을 들인 한시를 비롯한 수묵화 등으로 채워졌다. 집안 이곳저곳에 흩어져있는 실물들까지 일일이 찾아서 대조해 가면서 설명하는데 한 시간을 훌쩍 넘긴다. 자기도취에 빠져 인내의 한계점에 서있는 괴로운 내 모습은 안중에도 없다. 그러고 두 달 쯤 지난 뒤,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 듣고 갔더니 중년의 따님 혼자서 간병을 하고 있었다. 나를 알아보지도 못했고 병명도 정확히 알 수 없단다.

수액 주사에 의지한 당신의 거부로 일체 검사도 못하고 통증이 심하면 진통제를 쓸 뿐이란다. 강직한 성품의 참전 용사로 평소 입버릇처럼 자랑하던 고위 공직에 잘난 두 아들은 보이지 않는다. 돌아온 다음날, 운명하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장례식장을 다녀오면서 이제 주인 잃은 그 어른 유품의 신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우리 모두 조용히 각자의 주변을 한번 살펴보자. 천천히 생각하며 살피면 더욱 좋다. 돌아보면서 가구나 소품 하나하나에게 물어보자. ‘당신은 왜 여기에 있으며 언제 사용되며, 다른 곳 아닌 여기가 꼭 맞는 당신의 자리인가?’ 옷장, 신발장, 다용도실 등도 살펴보자. 이젠 소용이 없거나 버리기 아까워 자리 차지만 하고 있는 물건은 없는지. 우리는 어렵게 살아온 세대이다. 그래서 안 쓰고, 모으고, 아껴 쓰는 것이 체질화된 세대로 무엇 하나 버리지 못하는 버릇이 몸에 배어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채우기에만 급급한 나머지, 버리는 일을 잊고 살아왔다.

이제라도 무겁기만 하고 자리 차지만 하지 쓸모없는 것들이 주변에 없는지 살피고 또 살펴보자. 우리 모두 언젠가는 떠나야하고, 떠난 뒷자리는 깨끗해야 한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에만 매달려 살다가 자칫 놓쳐버리기 쉬운,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돌아보아야 한다.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싶은 욕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그래도 욕심 때문에 건강, 인심, 덕망 등 많은 것을 잃는 ‘노탐대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처지 내 분수에 만족하고 비우고 또 비워서 몸도 마음도 가볍게 하자. 우리가 진정 힘든 것은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함이 아니라, 원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는 데 있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