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 산책] 정여울 '헤세'
[장서 산책] 정여울 '헤세'
  • 김대영 기자
  • 승인 2020.09.28 10: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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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하여

이 책은 헤세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작가 정여울이 독일과 스위스에 남겨진 헤세의 흔적을 찾아다니며 헤세로부터 받은 치유의 순간들을 생생하게 전하는 책이다. 이 책을 통해 도주에서 방랑으로, 방랑에서 순례로 나아가는 헤세의 삶과 그의 작품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다채롭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은 헤세를 좋아하는 이들은 물론, 헤세의 작품을 읽고 싶지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막막한 이들을 위한 최적의 안내서라고 할 수 있다.

01. 여행자: 헤세, 사랑의 길 위에 서다

헤세는 오랫동안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두 번의 이혼, 세 번의 결혼, 조국 독일이 일으킨 전쟁에 대한 반대, 파격적인 글쓰기, 독일에서의 출판 금지, '애국자'가 되어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 동조하지 않은 '죄'까지, 그리고 첫 번째 아내와 자신의 우울증까지도 화젯거리가 되었다.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은 만큼, 더 많은 사람에게 비난과 질투도 한 몸에 받았다. 그 속에서 숱한 어려움을 겪었고, 경제적 곤란도 여러 번 겪었으며, 때로는 포도를 재배하고 그림을 그려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항상 '글쓰기'로 되돌아오는 자신을 발견했다. 글쓰기는 그에게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그를 비로소 그 자신으로 만들어주는 무엇이었다. 『데미안』에서 헤세는 속삭인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이야말로 죄악이라고. 거북이처럼 자기 안으로 온전히 파고들어야만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다고.(48쪽)

02. 방랑자: 끝없이 떠날 수 있는 자유

크눌프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떠돌이 인생이 아무 의미도 없을까 봐, 자신이 겪은 그 모든 고통과 행복이 허무에 지나지 않을까 봐 두려워했지만 신과의 대화, 자기 안의 더 깊은 무의식과의 대화를 통해 비로소 깨닫는다. 그는 인생을 허비하거나 탕진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가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다른 세상의 꿈’을, ‘자유라는 이름의 목마름’을 선물해주었다는 것을, ‘그녀만 내 곁에 있었다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 아니라, 실패했지만 사랑했다는 기억만으로 이미 그녀에게서 인생의 모든 축복을 선물 받은 것이었음을. 크눌프는 답답한 병원이 아니라 탁 트인 벌판 위에서 영원한 방랑자로서 마지막 숨을 들이마신다.

만약 당신이 알 수 없는 방향에서 이상하리만치 시원한 산들바람이 불어온다면, 머릿속에서 곡조를 들어본 적 없는 낯설지만 달콤한 휘파람 소리가 들려온다면, 그 산들바람을, 그 휘파람을 무시하지 말기를 바란다. 그때가 바로 당신 안의 크눌프가 당신에게 잠시 ‘쉬어 가라’고 속삭이는 순간이니. 재산을 축적하고, 명성을 관리하고, 인간관계를 조종하는 정착민의 욕심을 뛰어넘어 지금 우리가 지닌 것을 돌아보고, 사랑한 흔적들에 만족하며, 살아 있다는 것 자체를 축복하는 삶을 살라는 크눌프의 작은 소원이 당신의 심장에 가닿는 순간이니.(76~77쪽)

03. 안내자: 문득 길이 보이지 않을 때 간절해지는 것들

페터 카멘친트는 집단적인 이상, 조직사회의 목표를 동경하지 않았다. 오직 ‘나다움’을 찾기 위해, 자기 안에 길이 있음을 깨닫기 위해 고뇌한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이 함께 걸어가는 길이 아니라 나만의 고유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헤세는 페터 카멘친트를 가리켜 ‘스스로 창조한 꿈의 왕국에 사는 고독한 왕’이라고 했다. 페터는 자연 속에서 진정한 자신의 힘을 깨달았으며, 고독한 은둔을 통해 창작의 열정을 피워 올리는 예술가였다. 그는 오직 자신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찾아 길을 떠나는 영원한 방랑자였다. 국가, 사회, 조직에 속한 집단적 개인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인격체로서 개인에 무한한 관심을 기울였던 헤세의 문학적 여정은 바로 페터 카멘친트로부터 시작되었다.(121쪽)

04. 탐구자: 『데미안』의 탄생

인간은 두 번 태어난다. 첫 번째는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두 번째는 자신의 무의식이라는 내면의 자궁 안에서. 두 번째 탄생은 오직 ‘의식’의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서만 이루어낼 수 있다. 마침내 어머니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이 또 다른 나를 새로이 잉태하는 그날까지. 의식의 단단한 껍데기를 깨고 무의식의 희망인 아프락사스가 아름다운 날개를 펼치며 비상하는 그날까지. 내가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되어 결국 고통에 빠진 나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는 이야기, 내가 나의 멘토가 되고, 내가 나의 스승이 되어 그 누구도 나를 다치게 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데미안』이다.(149쪽)

05. 예술가: 그 끝이 비극인 줄 알면서도 달려가다

헤세는 일찍이 고흐의 불꽃 같은 삶을 글로 묘사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헤세가 화가로서 삶을 시작한 이후 고흐는 그의 마음 속에서 꿈틀거리는 하나의 뜨거운 화두였다. 클링조어(『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의 주인공)의 얼굴에서 문득문득 고흐의 얼굴이 스치고, 클링조어의 친구인 루이스의 얼굴에서 언뜻언뜻 고갱의 얼굴이 스치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귀가 잘린 자화상을 그리며 광기와 예술혼 사이에서 길을 잃었던 고흐의 분노는 헤세의 클링조어가 자화상을 그리며 느끼는 고통과 닮았다. 그러나 클링조어가 곧 고흐의 완전한 분신은 아니다. 클링조어는 고흐보다 훨씬 행복했고,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았다. 클링조어는 적어도 물감과 캔버스가 없어 동생에게 눈물겨운 편지를 써야 할 정도의 가난은 경험하지 않았다.

클링조어는 고흐보다는 헤세를 훨씬 많이 닮은 인물이었다. 헤세 또한 고흐처럼 심한 우울증을 겪곤 했지만 그림을 그릴 때만은 아이처럼 해맑고 즐거워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채화를 그린다’는 지극히 자기 충족적인 기쁨이 ‘화가 헤세’의 영혼을 채우곤 했다. 헤세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우울과 불안에 시달리지 않았다.(191~192쪽)

06. 아웃사이더: 소시민적 삶을 향한 저항

평생에 걸쳐 자신을 중요하고 위대한 사람으로 만든 괴테보다는 그저 음악을 통해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데서 기쁨을 찾은 모차르트야말로 하리 할러(『황야의 이리』의 주인공)의 진정한 이상형이었다. 가난하고 불행하게 요절했을지라도, 모차르트는 우리에게 영원히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곡을 쓰고 또 쓰는 아이 같은 창조자로 남아 있다. 모차르트의 음악에 스민 비눗방울처럼 가볍고 경쾌한 유머를 이해할 때, 그 유머 앞에서 진정으로 웃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 ‘인생의 희극성을 이해하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평생 ‘인간성’과 ‘야수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했던 지식인 하리 할러는 우리에게 조용히 속삭이는 것만 같다. 당신이 아직 웃을 수 있다면, 아직 우리에겐 희망이 있다고. 삶의 모든 어처구니없는 불행들을 때로는 유머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우리에겐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 거라고.(237쪽)

07. 구도자: 마침내 깨달음을 향하여 한 걸음

헤세의 여성들은 철새처럼 빠르게 이동하는 남성의 마음에 따라 너무도 쉽게 버려진다. 게다가 버려지는 순간 지극히 아름다운 '추억'으로 채색된다. 여성의 가슴에 든 피멍은 헤세의 주인공들에게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헤세 작품의 여성들은 너무 쉽게 사랑을 포기하고, 돌아오지 않는 남성을 기다리지도 않으며, 하룻밤의 인연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채색하는 데 익숙하다. 그것은 당대 여성들이 정말로 '쿨하게' 사랑의 아픔을 잊어버려서가 아니라, 헤세가 여성들의 마음에 남긴 상처의 결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헤세의 작품 중 '여주인공'이라 할 만한 캐릭터가 거의 없다는 점 역시 전형적인 남성 중심적 시선 때문은 아닐까. 헤세의 작중인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여성은 『데미안』의 에바 부인이나 『게르트루트』의 게르트루트 정도인데, 에바 부인은 '신비로운 이상형'으로, 게르트루트는 '속을 알 수 없는 비밀의 여인'으로 그려진다.

『싯다르타』의 카말라는 헤세의 여성 인물 중 그래도 꽤 적극적인 편에 속한다. 싯다르타는 당대 최고의 기생으로 알려진 카말라의 모습에 반해 먼저 다가가 구애를 펼친다. 그런데 이 접근을 순수한 사랑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고민다와 헤어져 생애 최초로 '완전한 혼자'가 된 싯다르타는 불현듯 속세의 삶이 그리워진다. 무엇보다도 사람의 온기가 그립다. 그리고 세속의 삶에서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는 깨달음에 사로잡힌다.

그런 그가 저잣거리에서 가장 먼저 발견한 아름다운 여인이 바로 카말라였다. 거의 걸인이나 다름없는 형상을 한 싯다르타는 카말라의 집으로 찾아가 그녀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달라'고 부탁한다. 완전한 구애가 아니라 카말라를 '사랑의 스승'으로 삼고 싶어 했다. 싯다르타는 카말라라는 여인 자체를 알고 싶었다기보다는 인간이 그토록 집착하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카말라는 결코 녹록지 않다. 수많은 남성의 마음을 쥐락 펴락한 경험이 있는 이 불세출의 여인은 그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지혜를 갖춘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카말라도 싯다르타 같은 남성은 처음이다. 유명한 남자, 돈 많은 남자, 잘생긴 남자, 유혹의 귀재임을 자처하는 남자, 그렇게 다채로운 남성들을 경험해 보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남자는 처음 본 것이다. "저는 사색할 줄 압니다. 저는 기다릴 줄 압니다. 저는 단식할 줄을 압니다."

장안의 모든 남자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카말라는 이토록 괴상하고도 신비로운 남자에게 탐구욕을 느낀다. 그녀는 부와 명예, 선망과 동경, 아름다움과 매력, 그 모든 것을 가져보았지만 진심으로 사랑하는 남자는 가져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강력한 캐릭터인 카말라조차 『싯다르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헤세의 싯다르타에게 카말라는 골드문트나 크눌프의 여인들처럼 '스쳐가는 인연'이었다.

하지만 카말라는 싯다르타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진다. 이미 '사랑의 기술'을 모두 터득한 싯다르타가 그녀를 떠나버린 뒤에, 싯다르타도 모르게 그의 아들을 낳는다. 당대 최고의 기생에게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것은 그녀의 인생 전체를 완전히 뒤바꿀 수밖에 없는 일생일대의 도전이자 고통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남성이 여성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의 인생의 극히 '일부'만이 필요하지만, 여성이 남성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녀 인생의 전부를 걸어야 한다는 딜레마. 그 안타까운 불균형이 내가 사랑하는 헤세의 소설에서도 어김없이 반복된다는 점이 가슴 아프다.

더욱 가슴 아픈 점은, 헤세의 시대보다 훨씬 여성의 사회 참여 기회가 확대된 오늘날에도 이 안타까운 불균형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헤세가 그린 사랑 이야기는 아름답지만, 헤세가 그린 여성들은 결코 아름답기만 하지 않다. 그녀들은 상처 입은 심장을, 돌이킬 수 없이 망가진 영혼을 홀로 끌어안은 채 죽거나 사라지거나, 아니면 흔적도 없이 망각되어야 했다.(244~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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