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 산책] 박선웅 '정체성의 심리학'
[장서 산책] 박선웅 '정체성의 심리학'
  • 김대영 기자
  • 승인 2020.08.10 10:0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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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잃어버린 당신에게 인생의 나침반이 되어줄 정체성의 심리학

이 책의 지은이 박선웅은 교려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이다. 이 책은 8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진짜 나'는 어디에? 2장 나는 이야기 안에 있다. 3장 여러 가지 색이 섞인 ‘나’라는 사람. 4장 누구나 인생의 주제가 있다. 5장 의미를 만들거나 의미를 찾거나. 6장 정체성, 자존감을 만들다. 7장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8장 ‘오늘’을 나답게 살기.

1.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정체성이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자신에게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삶의 방향에 대해 결단을 내린 정도를 의미한다. 어떤 일을 하는지는 정체성에 있어서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정체성이 꼭 직업에 관한 것일 필요는 없다. 언제 어디서든 지키고자 하는 삶의 원칙일 수도 있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추구하고 싶은 가치일 수도 있다, 정체성이 잘 형성되어 있는 사람은 다음의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이들은 영혼의 엑스레이 사진을 가지고 있다. 자신에게 무엇이 정말 중요하고, 자신이 행복한 순간은 언제이고, 자신의 삶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자신의 목적지가 찍힌 내비게이션을 가지고 있다. 즉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어떤 삶을 살 것인지에 대한 결정을 상당 부분 내렸다는 것이다.

셋째, 삶에 대한 지침, 가치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특성뿐만 아니라, 삶에서 이루고자 하는 것에 대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올바로 판단할 수 있다.(22~23쪽)

정체성이란 단어는 여러 맥락에서 다양하게 사용된다. 직업 정체성, 성 정체성,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 학생으로서의 정체성, 교수로서의 정체성 등 끝이없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정체성은 각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이다. 이야기로 표현된 개인의 정체성을 심리학에서는 서사정체성(narrative identity)이라고 부른다.

2. 이야기하는 인간, 호모 나란스

현생인류를 지칭하는 호모 사피엔스, 그보다 앞서 존재했던 호모 에렉투스 등의 용어는 원래 생물학적 종을 구분하는데 쓰였지만, 최근에는 인간의 고유한 특징을, 즉 인간이라는 종의 정체성을 묘사하는 데에도 많이 사용된다. 대표적으로 놀이하는 인간을 가리키는 호모 루덴스와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을 가리키는 호모 파베르 등이 있다.

그러나 공원에서 주인이 던지는 공을 주워오는 강아지도 놀이를 즐기고, 파나마에 있는 원숭이들이 견과류를 먹기 위해 돌을 이용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놀이를 즐기고,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인간만의 특성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래서 위스콘신 대학교 영문학과 교수인 존 나일스(John Niles)를 비롯한 몇몇 학자들은 인간에게 호모 나란스(Homo Narrans)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나란스는 ‘이야기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나로(narro), 영어로 내레이트(narrate)에서 나온 말이다. 결국 나일스는 호모 나란스라는 이름을 통해 인간의 고유한 특성은 바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표현한다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45~46쪽)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인간이라는 종의 고유한 특징이라면, 어떤 이야기를 갖고 있는지는 한 개인의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방법일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또 자기 자신에게 자신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어디서 시작되어 어디서 끝나게 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자신에게 중요한 인생 이야기들이 결국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 즉 정체성 그 자체이다.(47쪽)

3. 정체성의 세 가지 특징

정체성이 잘 형성된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는 크게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특징은 서로 모순되는 측면들을 통합하는 것이다. 삶에서 통합이 필요한 부분은 단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모습들뿐만이 아니다.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와 자신이 따르고자 하는 원칙 역시 서로 모순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두 개의 원칙 혹은 가치가 충돌할 때 꼭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다른 것을 버릴 필요는 없다. 그 둘을 자신 안에서 슬기롭게, 자기 자신을 설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통합하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하나의 원칙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체성 발달 수준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삶의 원칙이 있다는 것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있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두 가지 상반된 삶의 원칙을 조화롭게 통합하는 것은 자신이 삶의 주인으로서 굳건히 서서 양손으로 상반된 원칙을 붙잡고 균형을 잡고 있을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그 균형점이 어디인지는 오직 자신만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본다. 어찌 보면 우리 인생은 모두 하나의 결말을 향하고 있다. 바로 죽음이다. 그런데 죽음은 언제 우리에게 덮칠지 모른다. 그렇기에 미래만을 바라보며 현재의 즐거움과 행복을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을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현재의 즐거움만을 추구할 수도 없다. 미래를 대비하지 못하면 긴 세월을 가난과 고통 속에서 보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현재와 미래를 절충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원칙은 ‘내일 죽어도 후회하지 않게, 내일 죽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게’이다.(85~87쪽)

정체성이 잘 형성된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두 번째 특징은 한 가지 요소로 똘똘 뭉쳐 있는 것이다. 첼리스트 요요마의 경우 네 살의 나이에 첼로를 연주하기 시작해 아흔 장이 넘는 앨범을 내고 열여덟 개의 그래미상을 받았다. 하지만 요요마는 단순히 연주만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음악이 갖고 있는 화합의 힘을 가슴 깊이 믿어 이를 실현하기 위해 1998년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먼 옛날 실크로드가 세상을 엮어주었듯, 이제 음악으로 세상을 엮어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요마에게 음악은 단지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한 수단이라기보다는 그의 삶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스무 살의 김연아에게 인생은 피겨 스케이팅으로 똘똘 뭉쳐져 있었다.(95~97쪽)

여기서 유념해야 할 것은 인생 이야기가 하나의 주제로 똘똘 뭉쳐 있다는 것만으로 좋은 이야기가 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의 강압 때문에 판사가 되려고 공부만 하고 있는 학생의 이야기가 설사 공부로 가득 차 있다고 한들 좋은 이야기일 리 없다. 판사가 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설명하는 이야기가 있는지, 즉 판사로서의 삶에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정체성을 찾는다고 하면 지나치게 거창한 것들을 생각한다. 정체성이란 질풍노도와 같은 방황의 길을 걸었던 자만이 얻을 수 있는 무언가로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핵심은 지금의 길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방황과 탐색을 했는지가 아니라, 지금 이 길의 중요성을 얼마나 내면화(internalization)했는지이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어떤 사람은 남이 시켜서, 어떤 사람은 돈이나 명예와 같은 보상 때문에 일을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자신이 정말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혹은 일하는 것 자체가 즐거워서 일을 한다. 전자에 비해 후자의 사람들이 그 일을 내면화했다고, 즉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내면화 과정을 거쳤다면 김연아나 요요마처럼 평생 하나의 일에만 매진했더라도 정체성이 잘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105쪽)

정체성이 잘 형성된 사람들의 인생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세 번째 특징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의미치료(logotherapy)의 창시자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은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 세 가지를 소개한다. 첫째로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하는 것이다. 의미 있는 일이라는 것이 꼭 거창한 필요는 없다. 교수는 좋은 학생을 길러냄으로써, 요리사는 배고픈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함으로써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먹고 살아야 해서 사람들의 머리를 자른다는 미용사와 사람들에게 예쁜 모습을 찾아주고 싶다는 미용사는 같은 일을 하더라도 전혀 다른 삶을 살 것이다.

다음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은 사람과의 관계 맺음, 즉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충만한 의미를 경험하게 된다. 떨어져 있으면 자꾸만 보고 싶고, 생각만 해도 콧노래가 절로 나올 만큼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왜 사느냐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자식에 대한 사랑 또한 마찬가지이다. 혼자서 돌아눕지도 못해 하루 종일 누워만 있는 아기가 한 번씩 보여주는 미소에 삶의 고단함은 금세 날아가 버린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살 수도 있고 기꺼이 죽을 수도 있다.

프랭클이 제시한 삶의 의미를 찾는 마지막 방법은 시련을 통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오랫동안 굶주림에 시달리면 사람들 간의 차이는 모호해지고 모두 비슷한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프랭클이 배고픔보다 더 큰 시련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경험한 바에 따르면 인간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누군가는 쉽게 생을 포기했고, 누군가는 짐승과 다를 바 없이 행동했고, 누군가는 폐인이 되어버리기도 했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성자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시련이라고 하는 객관적인 상황의 압력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자동적으로,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을 굴복시키지는 못한다. 프랭클은 자신의 로고테라피를 통해 인간이 시련을 휘몰아오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을지라도 그 시련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음을 피력했다. 우리는 시련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도 있지만, 인간의 품격을 유지할 수도 있다.(122~127쪽)

4. 정체성과 자존감

자존감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한 인지적인 판단과 자기 자신에 대해 얼마나 긍정적으로 느끼는지에 대한 정서적 판단으로 이루어진다. 자신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세뇌하듯 반복해서 말하고 믿음으로써 높아진 자존감과 삶 속에서 자연스레 높아진 자존감은 같지 않다. 인위적으로 끌어올린 자존감은 그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에 인생의 파고에 휩쓸리기 쉽다. 자신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외치고 있는데 남들로부터 비판을 받거나 제출한 프로젝트가 안 좋은 평가를 받거나 할 일이 많아 스트레스가 쌓이는 상황에 처하면, 자신에 대한 판단과 현실 사이에 격차가 생기고 그에 따라 자존감이 휘청하게 된다. 이렇게 상황에 따라 높고 낮음을 반복하는 자존감을 연약한 자존감(fragile self-esteem)이라 부른다.

반면 튼튼한 자존감(secure self-esteem)은 살면서 실제로 이루었던 성취나 주변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라는 현실에 기반한 자존감이다. 튼튼한 자존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역시 이런 부정적인 상황이 달가울 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존감이 현저히 출렁이지는 않고 비교적 일관되게 높은 수준을 유지한다.(151~152쪽)

연약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왜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인지를 밝히는 구체적인 이야기가 없다. 반면 튼튼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야기가 있다. 어떤 어려움이 있었지만 결국 많은 노력 끝에 극복했다는 이야기. 어떤 도전이 실패로 끝났지만 그래도 좋은 교훈을 얻었다는 이야기. 이러이러한 아픔이 있었지만 저러저러한 기쁨도 있었다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이 모여 자신 안에서 의미로 맺힐 때 자신의 삶이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겨난다. 자신을 존중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난다. 자신의 이야기가 그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자신만의 견고한 이야기이듯, 자신의 이야기에 기반한 자존감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튼튼하게 유지될 것이다.(153쪽)

사람들은 살면서 인생의 길을 잃을 때 왜 사는지 묻고는 한다. 하지만 이 ‘왜’라는 질문은 그리 유용하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그냥 태어났으니까 사는 것이다. 진짜 우리가 물어야 하는 질문은 ‘무엇을 하며 살 것이냐’이다. 우리가 선택해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왜’라는 물음에 대한 근원적인 답변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삶이 힘겨워 절실하게 존재의 이유를 찾아야 하는 누군가가 답을 찾지 못했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삶을 멈추는 것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원해서 태어나지 않았을지라도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지는, 즉 존재의 방식은 우리 손에 쥐어져 있다.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어떤 주제가 있는 이야기를 남길 것인가. 정체성이 있다는 것은 ‘내 인생의 주인은 바로 나’임을 천명하는 것이다. 무엇을 하며 살지는 우리의 의지로 결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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