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문예지 '영남문학'은 한국사회가 직면한 문학의 수도권 쏠림 현상을 해소하면서 ‘문학예술의 지역화, 그리고 대중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2010년 여름에 창간했다. 부산·경남·울산·대구·경북 등 5개 광역시·도를 대표하는 통합문예지로 힘차게 출발하였다. 그동안 어려움도 많았지만 창간정신을 지키며 지역저널의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한국 최초의 지역문예지로서 올해 창간 10주년을 맞이하면서 이제는 한국문단이 괄목할 정도로 좋은 풍토와 결집된 단체로 지역사회에 당당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헌신적인 자세로 문예활동을 이끌어 오면서, 한국문단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는 사단법인 영남문학예술인협회 장사현 이사장을 만나 보았다.
-먼저 창간 10주년을 축하드립니다. 본인의 출생 및 성장과정에 대하여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1957년 경북 봉화군 봉화읍 적덕리에서 4남매 중 세째로 태어났습니다. 양반 가문이었으나 조부 때부터 가세가 기울면서 부모를 따라 춘양면 서벽리 두내동이라는 산촌마을의 가난한 화전민이 되었습니다. 맨 위의 누나는 일찍 출가하고 삼형제가 함께 자랐습니다. 큰아들은 공부시켜야 한다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저는 학교를 가지 못하고 일을 하면서 형님의 공납금을 마련하였고, 이어서 동생을 학교에 다니게 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초등학교도 3년 정도밖에 다니지 못했습니다. 입학 동기와 졸업 동기가 다를 정도로 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한 탓에 동네 친구 말고는 나를 기억하는 동창이 거의 없었습니다. 늘 헐벗고 굶주린 가운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화전을 일구어 농사를 짓는 것을 기본으로 온갖 힘든 일을 하였습니다. 11살 때부터 장작(땔감)을 팔아 양식을 구해왔습니다. 점차 자라면서 지게 품팔이, 조림사업, 산판(숯구이, 벌목, 목도), 광산 등 닥치는대로 돈벌이를 하면서 형과 동생의 학비를 마련하고 작으나마 토지도 조금 샀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중ㆍ고교를 다녔던 형님의 책과 동생의 책을 읽으며 혼자 공부를 했습니다. 동네 친구들이 서당을 다닐 때 천자문과 명심보감 등을 빌려 보면서 그냥 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980년 2월 6일 군복무를 마치고 나서 고향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너무 힘겨운 일을 한 탓에 골병(목, 어깨, 허리 등)이 들어 더 이상 노동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경찰공무원이 되었으며 공직생활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1980년 3월 12일 4천600원을 들고 무작정 고향을 떠났습니다. 마침 마을 친구가 김해에서 공장 직공으로 있기에 찾아갔습니다. 친구 자취방에 얹혀 있으면서 타일공장에 취업하여 일하면서 공무원시험을 두루 보았습니다. 그 중에서 선택한 것이 경찰공무원이었습니다. 1980년 10월 27일 큰 뜻을 품고 경찰종합학교에 입교하여 그해 12월 20일자로 제85기 수료와 동시에 순경으로 임용됐습니다. 초임에 창녕경찰서 대합지서를 시작으로 합천경찰서 정보과, 대구시경 기동대, 달서경찰서 정보과 등 20년간 봉직하였습니다. 공직에 있는 동안 정말 업무에 전념했습니다. 텅 빈 속을 채우기 위해 밤을 새워 업무 연구와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 당시 저에게 붙은 수식어가 ‘장 박사’였고 ‘영국신사’였습니다. 지금도 함께 근무했던 선배나 동료들은 저를 ‘장 박사’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들은 빈껍데기인 저를 문학박사인 줄 알기도 합니다. 하하.
-경찰공무원을 그만두게 된 동기와 문학을 하게 된 경위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1990년 9월 두 아들의 교육을 위해 경남 합천경찰서에서 대구시경으로 옮겨왔습니다. 타시.도 전출이 엄청난 경쟁이었지요. 도시에 왔기에 못다 한 공부를 하고 싶어 91년 봄부터 계명대학교 사회교육대학에 진학하였습니다. 야간대학을 하면서 상담심리학도 공부하여 전문카운셀러 자격도 취득하였습니다. 그리고 잠재된 꿈을 이루기 위해 계명대 내 문학동인 '녹향'과 시내 시인다방에서 운영하는 창작교실을 비롯하여 '시와반시 문예대학' 등에서 창작공부를 하였습니다. 비록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친가(인동 장씨)와 외가(청주 정씨)의 선비정신이 흐르고 있었던가 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문학동인 '선율문학회' 회장을 맡아 동인지를 몇 년간 발행하여 왔습니다. 그러다가 은사님 덕분으로 계간문예지 '생각과느낌'의 발행인 겸 주간을 맡으면서부터 문학에 전념하기 위해 경찰공무원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지인의 도움을 받아 영남대학교 사회교육원 수필창작과정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후 승격하여 동 대학의 문학예술과정을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이사장님의 잠재된 꿈이 문학인 걸로 여겨집니다. 그 꿈은 언제부터 태동이 되었으며, 그와 관련된 작품을 조금 소개하여 주십시오.
▶서벽초등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가끔씩 가는 학교였지만 맨발로 다녔습니다. 당시 담임이셨던 박희열 선생님께서 검정고무신을 사주시면서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쓴 일기를 이후에 '검정고무신'이라는 시로 옮겼습니다.
포플러나무 꺾꽂이 하던 봄날, 박희열 선생님이/권재춘 씨 점방에서 검정 고무신을 사주셨다./ ‘이거 신어라. 가난이 무서운 게 아니고 자신을/ 이기지 못하는 게 무서운 거란다./ 공부 열심히 하여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거라.’/ 맨발로 다녀야 했던 초등학교 2학년 시절/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그 하늘 너무 높아/ 포플러나무 사닥다리를 타고 올라 내 꿈의/보따리를 높이 걸어두었다/검정고무신은 진짜 표답게 질기고 질겼다,/ 그 질긴 고무신처럼 내 역경의 세월도 질겼다./ 째지고 터져 더덕더덕 기워진 상처는 아프고/ 시커먼 먹구름은 걷힐 줄 몰랐다./ 흐르는 구름 따라 굳었던 헌디도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모진세월 먹구름도 포플러나무 작은/ 잎사귀 떠는 바람에 밀려가 창공이 드높다,/ 청운의 꿈 펼쳐진 하늘가에 선생님 미소가/ 번진다. 살짝곰보 그 얼굴 구멍구멍 사이로/ 내 눈물이 채워지고 있다 -장사현의 시 '검정고무신'
다음은 유년시절 두 번째 시가 된 일화가 있습니다. 11살 때였습니다. 나무(장작)를 해서 양식을 구해야 했기에 동네 어른들과 몰래 벌목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산간수(산림청 소속 영림서 직원)한테 들켰을 때의 일을 처음으로 시라는 생각에 쓴 것입니다.
산간수가 왔다./ “이 나무 누가 베어 왔노?”/ “제제, 제가요.”/ “니가 우째 이렇게 큰 나무를 베어 올 수 있노? 그리고/ 저 산에 나무들은 누가 다 베었노?”/ “내내, 내가 베베, 베었어요.”// 어린놈이 그 큰 나무들을 벌목할 수는 없을 거라 여긴 산간수는// “저 나무들을 벤 동네 사람들 이름을 대주면 니는 봐줄게,/ 어서 말해봐.”/ “내 호호호, 혼자 베었어요.”/ “니 몇 살이노?”/ “옐한 찰요.”/ “열한 살! 열한 찰 맞아야겠구나.”// 화가 난 산간수는 내 뺨을 몇 대 때리고 동네로 내려갔다./ 마을 이장과 어른들이 닭을 잡아 산간수를 대접하고 무마하였다.// 말더듬이였던 나는 말 한마디 할 때마다 발을 굴러야 말이 나왔다./ 그럴 때마다 땅 속 불덩이가 지구를 흔들었다./ 어눌한 한마디 한마디가 모이면서 시의 싹이 텄다. - 장사현 시 '처음 시를 쓴날'
저의 잠재된 꿈에 대하여 유년시절의 단상 한 가지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열서너 살 때 산촌일기를 나중에 수필로 쓴 게 있습니다.
'…산촌의 가을은 짧다. 고운 빛깔의 단풍도 한풍에 지고 마른 솔잎이 수북이 쌓여가는 적막한 겨울. 산간에는 유별나게 눈이 많이 내린다. 온 산이 눈 속에 갇혀 있다. 밤이면 가끔씩 들리는 살쾡이 소리와 부엉이 울음조차 정겹게 들린다. 이런 밤엔 카랑카랑한 아버지의 고담 소설 읽는 소리가 적막을 깨고 있다.
삼국지 읽는 소리를 듣고 관운장이 되고, 유충렬전을 들으며 충렬이 되고, 춘향전을 들으며 이몽룡이 되었고, 가인의 일생을 들으며 첫사랑을 꿈꾸었다. 초등시절 나의 교과서는 아버지가 읽는 고담소설이었다. 이것이 나의 빛나는 졸업장이고 학력이다. -장사헌의 수필 '아버지와 고담소설' 중에서
-영남대학교에서 창작교실을 전담하신 기간은 얼마나 되었으며 그간의 성과는 어떠합니까?
▶2007년 3월 5일부터 영남대학교 사회교육원 강의를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대명캠퍼스에서 수필창작 지도만 7년간 하였습니다. 이후 2014년 하반기부터는 학교에서 수업 과목을 시, 시조, 수필, 자서전, 낭송 등을 묶어 ‘문학예술과정’으로 확대하면서 경산캠퍼스도 함께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그간 수료한 연인원이 835명입니다.
그 사이 구미시청 평생교육원, 구수도서관, 청도 문예교실 등에서 지도한 문하생을 포함하면 1천 명이 넘는 후학양성을 하였습니다. 또한 230명의 등단 작가를 배출하였습니다.
-문예지 '영남문학'을 창간하게 된 동기는 무엇이며 다른 문예지와 차별화되는 점이 있다면?
▶대부분의 문예지는 사무실에서 원고청탁, 편집하여 발행합니다. 그러나 영남문학은 발로 뛰어서 생생한 자료를 실었습니다.‘영남의 인물문학사’를 비롯하여 ‘문인 탐방’, ‘문학단체 탐방’, 영남유림의 명문가 ‘문중 탐방’ 등 많은 인력동원과 여비를 지출하면서 지면을 채워왔습니다. 특히 지역 문인들에게 지면을 고루 제공하면서 권익을 옹호하였으며, 지역브랜드를 살리는 작품을 창작토록 하는 등 지역저널의 역할을 충실히 하여왔습니다.
-창간 10주년을 맞는 '영남문학'은 그간 어떻게 운영하여 왔으며 그 성과를 간략히 말씀해 주십시오.
▶문예지를 발행하는 것은 경제적 부담을 늘 안고 있습니다. 2010년 여름 창간이후 2016년 겨울호까지는 계간으로 발행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출판비 적자가 누적되어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2017년도부터는 반년간으로 발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문학단체답게 4차례의 문학세미나를 개최하여 학문적 이론을 정립하였으며 회원들에게 부단한 창작 지도를 통하여 매년 신춘문예와 공모전에서 전국최고의 성과를 올리고 있습니다.
-사적인 질문 같으나 이사장님은 소설과 같은 인생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그간 좌절할 때도 있었을 텐데 그 고비를 어떻게 넘겼으며 현재 가정의 환경은 어떠합니까?
▶참으로 지난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유․청년시절에는 굶주림과 노동으로 온몸에 골병이 들었습니다. 공무원 생활을 할 때는 배움의 기본이 없어 눈물겨운 노력을 하였습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문예단체의 대표로 있으면서는 좋은 학위와 인맥이 없어 주변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할 때도 수없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물과 주변사람들을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으로 견디어 왔습니다.
가족으로는 97세의 어머니가 계십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복이 많습니다. 신혼시절 늘 밥을 굶던 아내가 아직도 힘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항상 웃고 살면서 남편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고 있습니다. 큰아들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입법고시를 하여 현재 국회입법조사처에 서기관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작은 아들은 부산교대를 졸업하여 현재 포항에서 초등교사로 있습니다. 두 아들한테서 손자가 네 명입니다.
-앞으로 공적인 일의 계획과 노후생활 방침을 듣고 싶습니다.
▶영남문학은 창간정신을 지키며 지역저널의 역할을 충실히 하겠습니다. 또 문학예술의 수도권 집중현상에 대한 간극을 좁히기 위하여 지역특성화 사업을 지속적으로 개발하여 지방 문화예술콘텐츠 산업의 성장을 위하여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이 될 때 문하생 중 적임자에게 이 모든 역할을 맡길 생각입니다. 이후에는 저의 본래 신앙을 찾아 속죄하는 마음으로 작으나마 봉사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평생 고생만 시킨 아내를 하루 한 번씩 웃도록 해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