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색과 흰색으로 그려진 그림 같은 요새 지역은 아시아 속의 유럽
서구 열강의 식민지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는 갈레 요새(Galle Fort)는 중세 시대 중요한 무역항이었다. 1505년 포르투갈 선원에 의해 처음으로 요새가 세워진 이후 1588년 포르투갈인에 의해 본격적으로 요새 지역으로 만들어졌다. 1640년 포르투갈인을 몰아낸 네덜란드인은 별 요새(The Star Bastion), 달 요새(Moon Bastion), 해 요새(Sun Bastion)를 포함하여 요새의 규모를 14개로 넓혔으며 1796년 영국의 지배 아래 시계탑 등 일부 시설을 개조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요새는 유럽풍의 공공건물과 창고, 비즈니스 구역, 주거지역으로 되어 있어 아시아 속의 유럽이라고 할 만큼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다.
며칠째 미리사(Mirissa)에 머물고 있다. 미리사 해변의 아름다움에 빠진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다른 숙소를 찾아다니는 귀찮음이 싫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새로운 숙소를 찾는 것도 만만찮지만 지금 머무는 리조트는 시설도 괜찮을 뿐만 아니라 융숭한 대접을 해주고 있기 때문에 떠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사지가 근질근질할 때쯤 배낭을 챙겨 메고 버스에 올라 스리랑카 식민지 시대의 지배자들이 아직도 살고 있다는 갈레 요새로 향한다. 차창 너머 펼쳐진 인도양의 파란색과 뭉게구름의 흰색이 그려낸 풍경화가 영롱한 눈물이 되어 떨어진다. 타히티 섬의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도 이 광경을 보고 가만히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환상에 빠진 지 40여 분이 되었을까. 버스는 경적과 함께 혼잡하기 그지없는 갈레 버스터미널로 들어선다.
터미널 주변에서 무엇을 먹을지 한참을 머뭇거리다 골목 입구에 깔끔하게 꾸며놓은 식당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는다. 메뉴판을 한 번 훑어보고는 망설임도 없이 “인도에선 카레지”라며 카레 음식을 시킨다. 매번 이런 식이다. 식당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무엇을 먹을 지로 실랑이를 벌이다가도 의자에 앉으면 까맣게 잊어버리고 아무 음식이나 게걸스럽게 먹어 치워버리는 것이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다면 형편이 달라지겠지만, 배낭 하나 달랑 멘 가난뱅이 여행자가 5성급 호텔이나 고급 음식점에 들락거릴 형편이 되지 못해 끼니 때만 되면 식당을 찾느라 곤혹스럽기 그지없다.
버스터미널 건너 크리켓(Cricket) 잔디 구장을 끼고 10여 분을 걷다 보면 갈레 요새(Galle Fort)의 관문(Main Gate)이 견고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두운 관문을 통과하여 성 안으로 들어서자 유럽풍의 오렌지색 거리 풍경이 불쑥 튀어나온다. 순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순간이동을 한 느낌이다. 깔끔한 거리 곳곳의 고풍스러운 건물과 중세 유럽인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는지 이중 삼중으로 만들어 놓은 성벽이 500여 년을 아시아 속에 버티고 있다. 지나치는 여행자는 한층 들떠 있는 표정이지만, 역사라는 옷을 입혀 바라본 갈레 요새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범선을 타고 이곳으로 건너온 이름 모를 보초병도 정복자였을까? 아니면 권력을 가진 자에게 이끌려 온 힘없는 민초였을까? 만감이 교차한다. 갑작스레 주변이 시끌벅적해지며 촬영 장비를 짊어진 한 무리가 분주하게 움직인다. 사진 촬영을 하는 모양이다. 잔뜩 멋을 부린 신랑 신부는 온갖 자세를 취하는 모양새가 모델 뺨을 칠 정도이다. 양해와 함께 사진 몇 장 찍고선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자 그들은 춤까지 보여주며 낯선 이에게 웃음을 선사해 준다.
성벽을 따라 바다 절벽 쪽으로 다가서자 발밑의 파도는 하얀 이를 보이며 바위를 끊임없이 때리고 있다. 뗏목을 던지기라도 하면 금세 파도에 휩쓸려 인도양 너머 다른 세상으로 떠내려갈 듯한 영화 ‘파피용(Papillon)’의 마지막 절벽 바다에 입을 다물 수가 없다. 눈을 감고 양팔을 쫙 뻗을 수밖에 없는 시원함에 속까지 다 후련해지는 멋들어진 풍경이다.
아찔한 절벽의 요새를 지나 갈레만 끝자락에 이르자 조명과 카메라 그리고 중세 시대 복장의 배우들이 무척이나 진지하다. 영화를 찍고 있는 감독의 눈초리가 매섭다. 모두가 감독의 입만 바라보는 듯하다. 잠시 쉴 양이면 주변 사람은 스리랑카 최고의 여배우와 사진 찍으려고 안달이다. 흥미로운 영화 촬영에 아예 나무 그늘에 앉아 넋을 놓고 구경을 한다. 무슨 영화인지는 모르지만 옷 모양새가 16세기나 17세기 정도 되는 모양이다. 귀족 부인도 있고 병사도 있고 장군도 있다. ‘컷’ 사인과 함께 존재감 없는 역할의 엑스트라 병사들이 그늘로 신나게 달려오는 모습이 너무나 해맑아 보인다. 촬영이 잘 되었는지 밝은 표정으로 성벽을 내려오는 여배우에게 인사와 함께 사진을 찍으며 엄지를 치켜세워 주자 웃음까지 보여준다.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갑옷을 입은 병사에게 들고 다니던 손부채를 건네자 한국 부채를 처음 보는지 신기해하며 서로 돌려가며 부채를 흔들더니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성벽을 내려와 널찍한 마을 앞 잔디밭에 이르자 경찰로 보이는 무리가 제식훈련을 하느라 땀을 흘리고 있다. 맞추어 선 줄도 그렇고 훈련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친구는 걷는 모습까지 따라 하며 “야! 무슨 당나라 군대도 아니고 걷는 게 절도가 없냐. 군기가 빠져도 많이 빠졌네.”라는 말에 다 같이 걷는 시늉까지 하며 한바탕 웃고 만다.
요새 마을은 동화 속의 마을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오렌지색의 마을이다. 레스토랑이며 카페 그리고 옷가게까지 있다. 21세기에 살아 있는 중세 시대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남아 마을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어느 카페에서 즐겁게 사진을 찍고 있는 젊은 스리랑카인은 역사의 아픔을 미움으로 담고 있지 않은 듯하여 좋다. 아픔을 준 유럽인들은 아직도 우월감에 빠져 이들을 힘들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카페에 앉아 있는 노란 머리의 젊은이를 쳐다본다. 한낮의 더위는 도로의 열기와 함께 여행자의 걸음걸이를 힘들게 하지만, 내리쬐던 햇빛도 어느새 기세를 다한 듯 성벽에서 쉬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