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Sri Lanka), 찬란한 문화의 도시에 가다②
스리랑카(Sri Lanka), 찬란한 문화의 도시에 가다②
  • 임승백 기자
  • 승인 2020.03.16 16:2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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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서려 있는 시기리야 고대 도시(Ancient City of Sigiriya)는 그들의 역사만큼이나 슬픈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으며, 솟아오른 사자 바위는 거대한 화랑(Gallery)이 된 세계문화유산이다.
슬픈 전설의 시기리야 전경이 펼쳐진다. 임승백 기자
슬픈 전설의 시기리야 전경이 펼쳐진다. 임승백 기자

야자수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햇살의 상큼함이 아침을 깨운다. 이른 아침 숙소 주변을 돌아다니는 버릇은 이미 습관이 된 지 오래이다. 동네를 돌며 현지인들의 삶도 엿보고 만나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다 보면 그들에게서 어떠한 악마의 모습도 찾아볼 수가 없는 순수함에 빠져든다. 이 또한 여행의 묘미를 더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동네 모퉁이에서 만난 아셀라(Asela)가 아침 식사를 식당이 아닌 호수 옆 오두막(Cabin)에 차려 놓을 테니 그곳으로 오라고 하고선 오토바이를 타고 어디론가 휑하니 가버린다.

'아니, 이 녀석이 뭘 잘못 먹었나? 5만 원짜리 손님을 50만 원짜리 손님으로 착각을 했나? 아니면 덤터기를 씌우려고 작정을 했나? 왜, 갑자기 숲속 오두막에서 아침을 먹으라고 하지?’ 숙소로 돌아오는 동안 의심이 가시질 않는다. 친구 녀석들은 ‘야! 얼마나 멋지냐, 오두막에서 먹자!’라고 조른다. 샌드위치와 커피 한 잔 정도로만 생각하고 간 오두막에는 주변 숲속 풍경과 어우러진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다. 여행하는 동안 인스턴트 음식에 길들여진 우리에겐 이보다 더 훌륭한 아침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눈요기만으로도 이미 배가 불러올 정도다. 정성이 가득 담긴 음식 하나하나가 여느 고급 레스토랑의 음식이 부럽지 않다. 식사를 마친 후 성찬에 대해 우리가 보답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셀라 딸들에게 몇 푼 되지 않는 용돈을 주는 것밖에 할 수 없어 미안하기 그지없다.

귀여운 아셀라 딸과 함께 야자수 숲길을 걷고 있다. 임승백 기자
귀여운 아셀라 딸과 함께 야자수 숲길을 걷고 있다. 임승백 기자

최고의 아침을 차려 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하자 아셀라는 웃음을 보이며 또 다른 친절을 베푼다. 오늘 가기로 한 시기리야(Sigiriya)와 피두랑갈라(Pidurangala)까지 단돈 3,000루피(2만 원 남짓)에 자기 승용차로 데려다주겠다고 한다. 생각도 못한 제의에 우리는 고마움과 함께 ‘녀석이! 왜, 자꾸 우리에게 이런 호의를 베풀지?’하는 의아심이 들며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이동 수단이 마땅히 없는 우리에겐 고마울 수밖에 없다.

아셀라의 멋진 승용차를 타고 고대하던 시기리야(Sigiriya)로 향한다. 가는 동안 가게에 들러 과일도 먹고 군것질도 하며 곳곳의 서민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던 아셀라는 혼다(Honda) 승용차보다 한국 승용차를 타고 싶지만, 승용차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것이다. 물어본 차 가격이 우리나라에서의 가격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비싸 깜짝 놀란다. 과거 우리나라도 수입차를 사치품처럼 취급하여 세금을 엄청나게 부과한 적이 있었던 것처럼 아마도 스리랑카도 세금 때문인 것 같다. 멋진 운전기사 겸 여행 가이드 역할을 해 주는 아셀라가 고맙기만 하다.

리조트 매니저 아셀라와 함께 추억을 남긴다. 임승백 기자
리조트 매니저 아셀라와 함께 추억을 남긴다. 임승백 기자

매표소 앞에는 여행객들이 줄지어 있다. 외국인의 입장료가 무려 30달러이다. 현지인들보다 10배 정도로 비싼 가격이다 보니 외국인들을 완전 ‘봉’으로 취급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표를 사는 동안 친구 녀석들은 왕방울 눈을 가진 스리랑카 여인네만 골라 사진을 찍어 댄다. 우리와 다른 모습의 사람들에게 호감이 가는 모양이다. 매표소에서 얼마 가지 않아 사진으로만 보던 전설의 시기리야 전경이 눈앞에 펼쳐지며 우리를 압도한다.

시기리야에는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서기 477년 왕의 아들 카사파 1세(Kashyapa)는 왕의 조카인 미가라(Migara)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다투세나(Dhatusena) 국왕의 왕위를 찬탈하고 산 채로 벽에 가두어 죽게 했다. 이를 본 이복동생 모갈라나(Moggallana)는 위협을 느끼고 인도로 피신하여 후일을 도모하게 된다. 권력에 취한 카시야파 1세는 이복동생의 공격이 두려워 수도를 시기리야로 옮기고, 서기 495년 모갈라나는 이곳으로 쳐들어와 카사파 1세를 물리쳤다. 요새의 왕궁에서 탐욕과 함께 평생을 살 것만 같았던 카사파 1세는 허망하게 자살해 버리고 만다.

시기리야(Sigiriya) 또는 신하기리(Sinhagiri)는 사자 바위를 의미한다. 우뚝 솟은 바위 서쪽에는 프레스코화(Frescoe : 석회가 마르기 전 그린 그림)가 있으며 그림에는 시녀들의 시중을 받고 있는 21명의 천상의 여인(Maidens of Clouds)들이 그려져 있다. 왕이 걸으며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는 거대한 거울 벽(Mirror Wall)에는 신할라어(Sinhalese)로 된 낙서 글귀들이 쓰여 있으며 그중 일부는 8세기의 글귀도 있다고 한다. John Still은 이곳을 ‘거대한 화랑(Gallery)과 같다’라고 말할 정도이다. 슬픈 아름다움의 고대 도시 유적은 1982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거울 벽(Mirror Wall)이 절벽에 걸려 있다. 임승백 기자
거울 벽(Mirror Wall)이 절벽에 걸려 있다. 임승백 기자

수직 절벽을 깎아 만든 가파른 계단을 힘겹게 오르다 보면 사자 발 형태의 문 앞 고원에는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는 관광객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다. 고개를 들어 정상으로 가는 계단을 볼 양이면 계단을 따라 끊임없이 오르고 있는 사람들로 장관을 이룬다. 두려움으로 피신한 국왕이 결국 죽음을 맞이한 것과 같이 누군가를 밟고 올라선 자신이 밟힘을 당하고 꼭대기엔 아무것도 없다는 진리를 부처가 알려 주는 것 같다. 정상에 오르면 화려했을 왕궁은 어디로 가고 황폐한 흔적만 남아 있으며 멀리 펼쳐진 숲들만 그때의 화려함을 말해준다.

하산 길에 스리랑카 스님을 만났다. 그 어느 누구도 알아봐 주지 않는 스님에게 우리는 합장을 하며 거금(?)을 시주했다. 외국인이 합장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시주까지 해 주니 스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으로 안전여행을 기원하며 친구 녀석의 손목에 실을 묶어준다. 놀라는 스님의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행운의 실이 우리의 안전 여행을 지켜 줄 것이라 믿고 한동안 손목에 묶고 다녔다.

길에서 만난 스리랑카 스님이 행운을 빌어 준다. 임승백 기자
길에서 만난 스리랑카 스님이 행운을 빌어 준다. 임승백 기자

시기리야 바위에서 내려와 오찬을 위해 간 현지 식당은 여행 가이드들이 단체 관광객들만 데리고 온다는 맛집이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관광지에서는 보이지도 않던 중국 관광객 무리들로 인해 시끌벅적하다. 잘 생긴 종업원이 우리를 아주 정중하게 자리로 안내했다. 패키지여행을 할 때면 항상 비싸다고 여겼던 고급 레스토랑에서 2,500루피(2만 원)에 4명이 배가 터질 정도로 먹었으니 시간의 여유도 없이 비좁게 앉아 배고픔을 달래는 중국 관광객에게 괜히 미안함 마저 느낀다.

오찬을 마치고 테라스에서 차를 마시며 시기리야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때 아셀라가 ‘일몰까지 시간이 있으니 낚시하러 가자’고 한다. '엥! 무엇이라고? 낚시? 당연하지 그걸 왜 물어보냐 이놈아! 가야지 당연히 가야지.’ 우리는 일정에도 없던 낚시를 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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