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의 섬, 세부(CEBU)에 빠지다②
천연의 섬, 세부(CEBU)에 빠지다②
  • 임승백 기자
  • 승인 2020.06.09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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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의 역사와 함께하여온 산 페드로 요새(Fort San Pedro)
그리고 삶이 살아 있는 카본시장(Carbom Public Market)
세부의 역사를 품고 있는 산 페드로 요새(Fort San Pedro) 전경. 임승백 기자
세부의 역사를 품고 있는 산 페드로 요새(Fort San Pedro) 전경. 임승백 기자

수그보 광장(Plaza Sugbo)의 나무 그늘에 앉아 잠시 더위를 식히며 올려다본 세부의 하늘은 피어오르는 뭉게구름의 하얀 색과 잘 어울리는 파란 색의 도화지이다. 미세먼지에 찌든 우리네 하늘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맑다. 보기만 하여도 기분이 상쾌하다. 옆에서 꿈적거리는 낌새가 느껴져 고개를 돌리자 콘이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공중부양을 시도하며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잘 뜨지 않네.”라고 혼자 중얼거린다. 틈만 나면 공중부양을 하려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하늘로 올라가면 몹시 더울 텐데…”라는 한 마디에 더위는 한꺼번에 사라진다.

산토니뇨 성당 옆 골목을 지나 도로를 건너면 산 페드로 요새(Fort San Pedro)와 세부항(Cebu Pier1)이다. 요새로 가기 위해 도로를 건너야 하지만 무지막지하게 달리는 차들로 인해 한 발자국도 떼질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다. 놀 때는 흥도 많고 낙천적인 사람들인데 운전을 하는 것을 보면 전쟁터에 싸우러 온 것 같다. 잔뜩 겁을 먹은 표정을 지으며 ‘여기서 죽으면 개죽음이다.’ 싶어 100m 달리기하듯 달려 도로를 건너고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목숨 걸고 건너온 요새 앞 광장은 내리쬐는 햇볕으로 인해 그야말로 불구덩이다.

산 페드로 요새는 1565년 500여 명의 병사와 함께 세부에 도착한 로페즈 레가스피(Miguel López de Legazpi, 1502~1572)에 의해 목조로 지어졌으며 17세기 초, 이슬람 해적의 침입이 잦아지자 요새를 석조 형태로 개조하였다. 지금의 삼각 요새는 1738년에 축조되었다고 한다. 요새는 스페인 사람들이 필리핀에 정착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16세기에 지어진 목조 형태의 산 페드로 요새(Fort San Pedro) 전경 삽화. ⓒwikipedia.org
16세기 지어진 목조 형태의 최초의 산 페드로 요새(Fort San Pedro) 삽화. ⓒwikipedia.org

요새의 양면은 바다를 향하고 다른 한 면은 육지와 마주하고 있다. 성벽에는 14문의 대포 중 일부가 지금도 남아 있어 관광객들의 시선을 끌고 있다. 스페인 통치에 이어 미국 식민지 때는 병영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일본군의 포로수용소로 활용되기도 한 요새는 세부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어 예사롭게 보이지가 않는다.

삽화들이 걸려있는 요새의 입구를 지나면 고풍스럽게 잘 가꾸어진 정원이 다가온다. 정원 옆에는 스페인 탐험대가 사용하였던 우물이 있다. 젊은 병사가 물을 긷기 위해 던진 두레박이 물에 떨어지는 소리가 울려 나올 듯한 우물은 방문하는 이를 16세기로 이끈다. 전시실로 들어서면 스페인과의 전투 장면과 함께 라푸라푸 왕의 카리스마 넘치는 초상화가 좁은 전시실을 압도하며 유리 상자에 펼쳐져 있는 스페인 병사들의 옷과 칼 그리고 찢어진 스페인 깃발과 함께하고 있어 아이러니(Irony)하지 않을 수 없다.

계단을 따라 성벽 위로 오르면 대포와 초소가 세부해협과 시내를 향하고 있다. 눈 앞에 펼쳐진 고층 빌딩과 대형 선박들이 드나드는 화려한 항구의 풍경 위로 빼앗으려는 자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간의 전투 장면이 겹쳐지며 세부라는 도시가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고 우리는 이름 없이 사라져간 그때의 사람들을 위하여 거리의 악사가 들려주는 음악에 맞춰 진혼의 춤을 춘다. 문명이라는 총칼을 앞세워 침탈한 강대국의 파렴치한 역사를 요새만은 알고 있으리라. ‘항상 맑으면 사막이 되고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야만 비옥한 땅이 된다.’는 스페인 속담처럼 뼈아픈 역사를 겪은 필리핀인에게 찬란한 미래가 반드시 찾아오길 기원하며 성벽을 내려온다.

요새 안과 밖은 한 무리의 중국인 관광객으로 시끄럽기 그지없다. 입구를 막고 있어 비켜달라는 부탁을 몇 번이나 하였건만 꼼짝도 하지 않는다. 여행 안내자의 설명을 들을 생각도 없는 모양이다. 동남아 여행을 하다 보면 가끔은 몇 대의 버스에서 내리는 엄청난 수의 중국 관광객을 만난다. 답답해지며 많아도 너무 많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여행자들 사이에 한국인과 일본인이 여행지를 개척하고 세상에 알려 놓으면 중국인이 들이닥쳐 박살을 내 버린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물론 일부 사람들의 농담 삼아 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한참을 기다려 요새를 빠져나온다.

요새에서 ‘죽음의 도로’를 다시 건너면 세부의 최대 전통시장인 카본시장(Carbon Public Market)이 있다. 시장 입구에 들어서자 벵칠이가 던진 한마디에 웃음이 터지고 만다. “여행객 여러분! 이곳은 매우 위험한 곳이니 가방을 앞으로 메시고 소매치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1시간 후에 이곳으로 모이시기 바랍니다.”

세부 최대의 시장인 카본시장(Carbon Public Market). ⓒwikipedia.org
세부 최대의 시장인 카본시장(Carbon Public Market). ⓒwikipedia.org
카본시장 내부 전경. ⓒunsplash(by Hitoshi Namura)
카본시장 내부 전경. ⓒunsplash(by Hitoshi Namura)

카본시장에는 없는 게 없다. 특히 저렴하고 싱싱한 열대과일을 보는 순간 관광객들은 넋을 놓기 일쑤다. 노점상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길래 호기심이 생겨 들여다본다. 노점상이 핏대를 세워 칼을 팔고 있다. 무지하게 튼튼하다며 시범 삼아 칼을 탁자에 내리치는 순간 칼이 두 동강이 나버리자 구경하던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는다. 한 편의 코미디가 따로 없다. 시장은 살아 움직이는 삶들이 있어 언제나 흥미롭다. 세부인들의 실생활과 부딪히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세부 바다는 노란빛으로 물들어 간다.

숙소 인근 식당으로 가기 위해 택시에 오른다.

“만다우웨(Mandaue)에 있는 마티야스(Matias) 식당으로 가 주세요.”

“그곳이 어디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면 포츄나 거리(Fortuna Street)에 있는 AABBQ는 아시나요? ”

“예, 그곳은 압니다.”

“마티야스 식당이 AABBQ 인근에 있으니 그곳으로 가 주세요.”

택시를  탄 지 얼마가 지났을까? 구글 지도를 보고 있던 콘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엉뚱한 길로 가는 것 같은데…”라며 잔뜩 긴장하며 말을 건넨다. 콘이는 운전기사에 다시 물어보지만 제대로 가고 있다는 답변만 한다. 택시가 가는 방향과 스마트폰 택시가 가는 방향이 정반대로 움직이니 콘이는 팔짝 뛸 노릇이다. 설마 싶어 녀석의 스마트폰 지도를 보고선 배를 잡고 웃을 수밖에 없다. 녀석은 다른 지역에 있는 AABBQ를 보고 있었다. 상황을 설명해 주자 택시 안은 가는 내내 웃음바다가 된다. 낯선 곳에 오면 여행객들은 한동안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기 일쑤다. 요즘에야 전자기기가 발달하여 실수하는 일이 적지만 전자기기만 믿고 있다가는 엉뚱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

퇴근 시간이라서 그런지 마티야스(Matias) 식당으로 가는 도로가 무척이나 혼잡하다. 한참 만에 택시에서 내려 식당으로 들어선다. 마티야스는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 소위 ‘세부의 맛집’으로써 서민들의 외식장소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이른 저녁 시간인데도 소문난 식당답게 식당 안은 손님들로 붐빈다. 먹을 음식을 쟁반에 담아 직원에게 전달하면 요리된 음식들이 어김없이 앉은 자리로 찾아온다. 직원들의 머리가 얼마나 좋으면 그렇게 많은 음식의 주인을 정확히 찾아오는지 신기할 정도다.

세부 만다우웨(Mandaue)에 있는 맛집 마티야스(Matias BBQ)의 맛있는 바베큐. 임승백 기자
세부 만다우웨(Mandaue)에 있는 맛집 마티야스(Matias BBQ)의 맛있는 바베큐. 임승백 기자

음식 맛도 짜거나 맵지 않아 우리 입맛에 딱 맞다. 적당히 잘 구워진 고기는 부드럽고 단맛까지 난다. 거기에 산 미구엘(San Miguel) 맥주를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맛 때문인지 음식을 몇 번을 더 시켜 먹고서야 포크를 내려놓는다. 지켜보던 직원이 우리를 쳐다보며 싱긋이 웃는다. 외국인이 현지인보다 더 맛있게 자신들의 음식을 먹는 것이 신기했나 보다.

맛있는 음식과 함께 시내 투어 이야기로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을 즘, 식당 입구에서 잠시 만나 몇 마디를 나눈 중년의 남자가 연신 우리를 보고 웃는다. 맥주가 마시고 싶었는지 산 미구엘 자랑까지 늘어놓는다. 맥주 한 잔을 건네자 얼굴에 화색이 돌며 아예 합석할 자세이다. 우리와 같이 잔을 부딪치며 즐기자 옆에 있는 그의 부인의 따가운 눈총이 예사롭지가 않다. ‘아저씨! 아줌마 화났어, 자리로 돌아가셔. 오늘 집에 가면 혼날 텐데 어쩌시려고…’

현지식당인 마티야스 내부 전경. 임승백 기자
현지 식당인 마티야스 내부. 임승백 기자

세부에서의 첫 만찬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지프니(Jeepey)에 오른다. 차는 승합차를 개조하여 만든 것처럼 작고 비좁다. 허리를 잔뜩 굽혀 오리걸음으로 오르자 차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입을 가리고 속웃음을 웃는다. 괜히 미안하고 쑥스러울 수가 없다. 자리에 앉아 낮은 천장에 머리를 몇 번이나 부딪혀 아파하는 모습에 지프니 안은 웃음소리로 떠나간다. 갑자기 얼굴이 따끔하다. 앞에 앉은 게이(Gay) 녀석이 우릴 뚫어지게 쳐다보며 야릇한 눈빛을 보낸다. ‘그만 쳐다봐. 우린 그런 여행자 아니다.’라며 무언의 신호를 보내지만, 눈빛은 더욱 강렬해진다. 하필이면 게이 녀석이 우리와 같이 내린다. ‘오해 말아라. 우리는 널 어찌해 보려고 따라 내리는 게 아니라 숙소가 여기라서 내리는 거다.’  지프니에서 내려 겨우 허리를 편다. 세부의 밤은 거리의 불빛과 젊음으로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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