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여인의 얼굴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코가 없었다.
형리의 걸음걸이를 보는 나라님의 눈길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가늘게 흔들린다.
“와~ 왕이시어!, 하~ 향후 이~ 일이 그~ 그 지경에 이른다면 미~ 미천한 이~ 이 소녀도 다~ 다시” 고개를 숙여 숨을 고른 뒤
“예~ 그러한 지경이면 그때는 이 소~녀 생각을 해보겠나이다” 하는 것으로 도화랑은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진지왕이 죽었다. 진지왕이 죽었다는 소식에 도화랑은
“이제야 크나큰 근심 하나를 덜었구나!”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 쉬었다. 한데 일이 공교롭게 되려고 그랬는지 도화랑의 남편 또한 진지왕과 거의 같은 시기에 죽어버린다. 남편의 죽음을 두고 도화랑은 왕이 죽은 마당에 별일이야 있겠냐 싶었다. 지난날 언약한 남편의 사후에는 다시 생각을 해보겠다는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다 여겼다. 그렇게 태평스러운 나날들이 흘러가던 어느 날 밤이다.
보름달도 훤한 날을 맞아 아이들은 까무룩 꿈속을 찾아든 머리맡에서 바느질거리를 손에 쥔 도화랑이 홀로 앉았는데 문득 문밖으로 풍악 소리가 요란스럽다. 딸랑거리는 말방울 소리에 이어 긴 여음의 말 울음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듯하다. 급기야 문을 열고 밖을 보니 달빛이 싯누렇게 내려앉은 속으로 진지왕이 생시처럼 말에서 내리고 있다. 눈을 비비고 봐도 죽었다던 진지왕이 틀림없다. 도화랑은 황망한 중에 마당으로 내려서서 진지왕을 맞는데
“내 지난날 그대가 본 왕에게 한 약속을 지키리라 믿고 찾아 왔네만!” 하는데 달리 변명거리가 없다. 어쩔 수 없이 도화랑은 그 밤을 들어 진지왕을 모실 수밖에 없었다. 이후 진지왕은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어김없이 찾아 왔고 마침내 도화랑이 임신하고 아이를 낳으니 사람도 귀신도 아닌 반인반귀(半人半鬼)의 비형랑(鼻荊郎)이다.
나라님이 제시한 황후 자리가 온통 여인의 마음을 뒤흔들었건만 일 없다며 마음에서 지웠다. 이는 슬하에서 고만고만하게 크는 자식들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나라님이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여 훌쩍 떠난다면 먹고 사는 것이야 어떻게든 되겠지만 어미로써 진정 그럴 수는 없다고 여겼다. 어미가 되고 싶어 된 것도, 자식이 제 오고 싶어 열 달을 뱃속으로부터 온 것도 아니지만 어미라면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참이나 생각에 잠겼던 여인이
“나라님이시어 이것저것 생각할 것이 많다 보니 지금 당장에 결정을 내리기는 어렵겠나이다. 얼마간의 말미를 주신다면 그때는 소녀가 답을 드리겠나이다” 고개를 숙이는데 그 모습마저도 나라님의 애간장을 녹여 내고도 남는다. 우윳빛으로 뽀얀 목덜미에 머무는 시선 때문인지 한정 없이 가슴이 두근 반 세 근 반이다.
궁으로 돌아온 나라님은 일각을 여삼추로 기다린 끝에 약속한 날짜에 이르러 그 여인의 집을 다시 찾았다. 요란하게 풍악을 울리고 왕후를 모시는 예로 화려하게 치장을 마친 커다란 연(輦)을 뒤따르게 하여 마당으로 들어섰다. 여인은 이미 각오를 한 듯 마당으로 내려와 나라님을 맞아 정중하게 방으로 안내했다. 나라님이 자리하자 맞은편으로 선 여인은 큰절로써 예를 표한 뒤 다소곳하게 자리를 하여 앉는다. 한데 지난날과 달리 여인의 얼굴이 생소하다. 무슨 이유에선지 검은색 천으로 눈 아래를 가렸다. 하지만 나라님은 지아비를 맞는 부끄러움이라 여겨 바라다보는데 샛별같이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가 애간장을 녹이고도 남는다. 이미 궁으로 들어갈 몸으로 무엇이 그렇게 부끄러울까? 나라님이
“그대의 얼굴을 가린 망사는 다 무엇이요?” 질타에 가까운 질문에 눈물을 글썽이는 여인은
“나라님이시어 어린 것들이 무슨 죄가 있겠나이까? 소녀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지만 어떤 경우에라도 나이 어린 제 자식들의 가여운 목숨이라도 어떻게든 보존하게 해주시옵소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떨군다. 이에 나라님은
“알겠노라! 내 그대의 소원대로 어명으로 약속하노라!” 할 때 여인이 얼굴을 가렸던 천을 천천히 풀어 민낯을 보이는데 왕은 깜짝 놀랐다. 서서히 드러나는 여인의 얼굴은 한마디로 마기꾼(마스크와 사기꾼의 합성어로 마스크를 착용했을 때 상상한 얼굴이 마스크를 벗은 모습과 완전히 다르다는 의미의 신조어)이었다. 쳐다보기가 무서울 정도로 흉측했다. 얼굴에서 천을 걷어낸 여인은 미인이 아니었다. 일국의 나라님 마음을 좌지우지하여 움직일 만큼의 경국지색은 결코 아니었다. 나라님이 여인의 얼굴을 보고 놀란 이유는 칼로 얼굴을 낭자해서가 아니다. 그때 여인의 얼굴에는 당연히 있어야 할 코가 없었다. 코가 없다 보니 뻥 뚫린 두 개의 콧구멍이 흡사 해골바가지를 연상케 하고도 남았다. 눈과 입 그리고 귀, 발그스레한 도화(桃花)빛깔의 양 볼이 있으면 무얼 할 것인가? 대들보나 다름없는 코가 없다 보니 그냥 보기에도 겁을 집어먹을 지경이다.
그간 심사숙고 끝에 여인은 어머니로 가는 길에서 걸리적거리는 미모에 대해 과감하게 단죄한 것이다. 여자로서는 미모가 그 무엇보다 중요했건만 어머니로서는 그런 미모가 필요 없다 여긴 것이다.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여겼다. 그럴 바에는 미모를 포기하기로 작정하고 코를 베어버린 것이다.
옛날 중국 진나라의 재상 중에 상앙이 있어 변법을 펼쳤다. 법가인 그는 법의 공평성을 그 무엇보다 강조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여 위법을 저지른 자는 법에 따라 엄정하게 판결을 내렸다. 그러던 중 태자(太子)가 법망에 걸려들었다. 당시 진나라의 법대로 처분한다면 태자는 치외 법권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었다. 따라서 왕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처벌이 불가능이다. 하지만 상앙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결국에 태자는 비형이라는 형벌을 받아 코가 베어진다. 이로 인해 태자는 상앙에게 씻을 수 없는 원한을 품는다. 마침내 왕이 죽고 정권이 바뀌었다. 처지가 바꿔버린 것이다. 그러자 태자는 가장 먼저 원한에 사무친 상앙을 잡아들어 오마분시(五馬分尸)로 한을 씻는다.
코를 벤 여인을 보는 나라님은 노발대발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여인을 벌할 수는 없었다. 궁으로 돌아오는 내내 왕은 여인에게 가할 형벌을 생각하고 있었다. 여인은 물론 그 자식들까지 싹 쓸어서 죽여 버릴 것을 다짐이다. 삼대를 들어서 아주 씨를 말려버리라 작정이다.
“나라님인 나를 능멸하고 무시해도 유분수지! 발칙한 것 같으니, 싫으면 싫다고 말로 할 것이지 어딜 감히 제멋대로 코를 베기를 베!” 당장에 왕은 형리를 부르라 어명을 내리고는 용상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액살(!縊殺), 액살이나 자진, 사약 등은 지은 죄에 비해 너무 시시해! 최소한 살점을 저미는 능지처참(陵遲處斬), 허리를 꺾는 요참(腰斬), 삶아 죽이는 팽형(烹刑). 사지를 찢는 오마분시(五馬分屍) 정도는 돼야지! 그렇지 나라님을 능멸한 죄에 그 정도는 돼야 합당하지! 한데 그녀의 어린 자식은? 네 왕명으로 약속하여 살려 준다 했는데!” 골똘히 생각하는 저만치로 형리가 종종걸음으로 급하게 들어오는 모습이 어릿어릿하다. 형리의 걸음걸이를 보는 나라님의 눈길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가늘게 흔들린다. 이윽고 탑 전에 이른 형리가 어명을 받들고자 부복을 하려 허리를 굽히는데 나라님은 일 없다며 물러가라며 손짓이다. 어안이 벙벙한 형리가 자리를 뜨자 나라님은 좌우를 살펴 시립 한 환관을 손짓으로 조용히 불러서는
“지금 당장 그 여인의 집으로 평생을 들어 풍족하게 먹고 살 만큼의 재화를 내리는 동시에 그 여인을 들어 어머니로서 더 없이 지고지순, 숭고한 뜻을 받드는 의미의 고비(高妃)라는 칭호를 내리노라!” 명한다.
“아울러 이후 그 여인이 원한다면 모르겠거니와 진정한 어머니로 살아갈 수 있게 그 누구라도 청혼을 할 수 없게 하노라! 만약 어명을 어기고 청혼이나 혼담을 넣는 자가 있을 시는 이는 왕권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으로 여겨 지위고하를 막론 엄벌로 다스릴 것이니리!” 왕명으로 못을 박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