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가족] 부부 ‘남’에서 ‘님’으로
[그래도 가족] 부부 ‘남’에서 ‘님’으로
  • 원석태 기자
  • 승인 2023.04.27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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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도 남편과
대가족 속 신혼, 미안하고 고마워
효자· 효부상, 가정화목상 받은 부부 이야기
과수원 앞에 선 오종희· 황필선 씨 부부. ‘효부상’과 ‘효자상’, ‘가정화목상’을 받은 두 사람은 여전히 처음의 그 설렘을 간직하고 있다.
과수원 앞에 선 오종희· 황필선 씨 부부. ‘효부상’과 ‘효자상’, ‘가정화목상’을 받은 두 사람은 여전히 처음의 그 설렘을 간직하고 있다.

의성군 금성면 금성산 자락에 있는 과수원, 사과 꽃잎이 바람결에 날려 와 얼굴을 스친다. 산골짜기의 물은 산골짜기에 머물고 싶어 하나 솔밭 사이로 흘러 도랑을 만나고 개울을 거쳐 강으로 간다. 흐르는 강물 같은 세월도 어느덧 40여 년이 흘렀다. 탑리리 오종희(70) 씨는 고운 아내의 얼굴이 어느덧 주름이 그려진 할매가 다 되었다며 쓴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리고는 ‘부부’라는 이름으로 함께 한 길고도 짧은 시간의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이곳에서 시작된 삶의 시간

고향인 안평을 떠나 여기에 터를 잡고 살아 온 지 50여 년이 되었다. 오종희 씨는 8남매의 맏이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을 모시고 두 분의 누님과 다섯 명의 동생과 함께 70~80년대의 모두가 겪었던 어려운 시대를 살아왔다. 어릴 적부터 농사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생활했지만, 농사일을 더 많이 한 날들이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부모님 그리고 동생들과 함께 잘살아 보겠다고 다짐하고 사과 과수 농사를 시작했다. 맏이라는 책임감으로 가장의 역할을 다하였다. 동생들의 학업 뒷바라지와 한 명, 한 명씩 결혼도 시켰다. 자신에게 투자할 시간과 여유도 잊은 채 오로지 농사와 가족만을 생각하며 이 길로만 걸어왔다.

아내와의 만남

이웃에 사는 먼 친척의 소개로 아내(황필선)를 만났다. 당시 아내는 청송에 살면서 의성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오빠네 집에 자주 방문했었다고 한다. 자란 환경이 다르고, 게다가 8남매의 맏이인 오종희 씨와의 결혼 결심은 아내의 대단한 용기와 모험이었으리라. “도시보다 열악한 환경과 낯설고 힘든 농사일, 넉넉하지 않은 살림살이와 많은 식구, 집안의 반대까지…. 무얼 보고 이 길을 왔는지”라며 큰 소리로 웃는 오종희 씨의 눈가엔 무언가 반짝였다.

신혼의 시작은 시부모님을 모시고 서툰 농사일로 시작했다. 바쁘게, 그리고 열심히 일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동생들도 다 결혼하여 집을 떠났다. 어머니는 몇 년을 암으로 고생하시다가 작년 98세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자녀로는 두 아들이 의성과 안동에서 살고 있으며 손자 셋과 손녀 한 명을 두고 있다.

남남이 만나, '님'으로

농사일 경험이 없었던 아내는 이곳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 일이 생소하고 서툴러 처음엔 실수도 많이 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시골 생활을 과연 버텨 낼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의 소리도 들었고 때론 황당한 일로 웃게도 하였다.

다섯 명의 동생, 아들 둘과 함께 한 지붕 아래에서 생활했다. 동생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따라 떠나갔다. 아내는 모든 일에 어려운 형편에도 최선을 다하였다. 지금은 모두가 안정된 생활로 잘살고 있어 걱정이 없으며, 지난날의 모든 일을 감사함으로 기억해 주는 동생들이 고맙고 모든 일에 잘 따라주고 있어 마음이 편하고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어머니의 오랜 암 투병의 시간은 아픔으로 남아 있다. 거동이 불편하여 수발과 간호를 아내가 도맡아 했다. 남편이 도와주는 것은 일부분이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싫은 내색도 하지 않은 채 목욕도 시키고 대· 소변까지 받아냈다. 작은 몸집에 감당하기 어려워 보여 주위 사람들이 시설 입소를 권했지만, 끝까지 집에서 모셨다. 농사일은 끝이 없는 일의 연속이지만 열심히 살아왔기에 많은 사람의 본보기가 되었다고 하여 의성군에서 수여한 장한 ‘효부상’과 ‘효자상’도 받았다.

그리고 내무부 장관(당시 김용태)으로부터 모범 가정으로 선정되어 ‘가정화목상’도 받았다.

수확한 사과를 선별작업한 뒤 포장하는 부부. 보지 않고도 손발이 척척 들어맞는다.
수확한 사과를 선별작업한 뒤 포장하는 부부. 보지 않고도 손발이 척척 들어맞는다.

서로에게 전하고픈 말

남편 오종희 씨는 “감사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는 걸 알지만 어떻게 달리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처음 시집와서 시어른과 한집에서 그리고 다섯 명의 동생과 함께 살면서 불편도 컸겠지만, 싫은 내색하지 않고 챙겨주었습니다. 분기마다 등록금 고지서가 줄줄이 날라 왔지만, 입는 것, 먹는 것까지 줄여가면서 한 번도 늦음이 없이 세심하게 챙겨주었습니다. 새색시의 꿈이 있지 않겠습니까만 모든 걸 내려놓고 이리저리 열심히 집안을 보살피고 뛰다시피 하면서 아이를 기르고, 6천여 평의 사과밭을 함께 농사를 지었습니다. 사과 농사일은 일 년 내내 합니다. 가지 전정하기, 잎 따기, 수확과 선별작업 등 그리고 농약은 10번 정도 살포합니다. 저농약이지만 바람이 불거나 날씨에 따라 노출되어 주저앉은 때도 있었고 지금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몰려옵니다”라며 아내에 대해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다.

아내 황필선 씨는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여기까지 오게 된 모든 일들이 저 혼자로는 오지 못하잖아요. 남편의 이해와 관심, 격려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가족 모두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오히려 시어머님을 더 잘 보살펴 드려야 했고 시동생, 시누이들에게 부족하게 했던 부분에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라고 했다.

예전 TV에서 한때 유행한 말이 있다. 남편은 평생 웬수라고! 그러나 황필선 씨는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남편에게 시집을 오겠다고 한다. 대장간의 망치질과 풀무질로 불순물이 제거되어 견고한 금속이 만들어지듯 사랑은 서로를 위하고 함께 이겨내 온 세월만큼 순수하고 단단한 사랑이 완성되는 건 아닐까? 결혼생활은 수필도 시(詩)도 아니고 산문이라는 말이 있다. 잠시의 기쁨이 아니고 긴 시간에서 익어가면서 쓰이는 노트이다.

오늘도 사과 꽃순을 따며 하루를 보낸 오종희 씨는 말없이 아내 황필선 씨의 어깨를 거친 손으로 토닥여 준다. 발그스레 붉어지는 얼굴을 보니 처음 그 사랑의 설렘이 아직도 흐르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