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가족] 그리운 나의 아버지· 어머니
[그래도 가족] 그리운 나의 아버지· 어머니
  • 강지윤 기자
  • 승인 2023.04.27 15:11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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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4·19와 5·16, 민주화운동…
근·현대사의 아픔을 그대로 견디셔야 했던 부모님
이제 꿈에도 잊지 못하던 나라의 품에 잠드시길
육군본부 감찰감실에서 열린 결혼식.
육군본부 감찰감실에서 열린 결혼식.

얼마 전 대구에 있는 올케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님 보훈처에서 연락이 왔는데 아버님을 대전의 현충원이나 영천의 호국원에 모실 수 있다고 하네요. 어머님도 함께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생각하다마다. 거기야말로 아버지가 제일 있고 싶어 하는 곳일 것 같아.”

“그럼 그렇게 신청할게요. 호원 아빠도 그게 좋겠다고 하고요.”.

전화를 끊고 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빈집에서 오래도록 소리 내어 혼자 울었다. 오랫동안 아버지를 잊고 살았다는 자책과 살아생전 제대로 아버지 사랑에 대한 보답조차 못 했다는 후회가 가슴을 후벼 판다.

육군 소위 시절의 아버지
육군 소위 시절의 아버지

6·25 전쟁과 아버지

아버지는 1985년 예순둘, 지금의 내 나이보다도 훨씬 적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지 올해로 38년째다. 1922년생이니 1백여 년 전 태어나서 2차 대전과 6·25 전쟁, 4·19와 5·16, 민주화운동까지 격변기를 온몸으로 겪으셨다. 1985년 추석 며칠 후, 그동안 입원해 계시던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았다. 오래도록 간경변을 앓고 계셨다. 친정에 도착했을 때 마지막 숨을 힘겹게 쉬고 계셨다. 의사인 동생이 사망선고를 내리고 두 눈을 감겨 드렸다. 빈소를 차리고 밤이 깊어 대청에 앉아 있는데 하얀 나비가 날아와 대청마루를 몇 바퀴 돌더니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마치 아버지의 마지막 애틋한 작별 인사인 것처럼.

근교 공원묘지로 아버지를 모셨다. 돌아오는 도롯가에는 무리 지어 피어난 코스모스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경북 김천시 금릉군 농소면 덕곡동이 본가인 아버지는 일찍이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에 투신하며 만주와 중국으로 떠돌아다니시자, 큰댁에 얹혀 지내게 된다. 할아버지 친구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해방된 고향으로 돌아와 교사가 된다. 그도 잠시 6·25가 터지고 아버지는 육군에 입대한다.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 아버지는 총알이 허벅지에 박히는 상처를 입고 제대하게 된다. 그 흉터는 평생 남아, 날씨가 흐리거나 장마철이면 몹시 힘들어 하셨다. 어릴 적 장롱을 열면 훈장이 잔뜩 달린 멋진 군복이 걸려 있었다. 무궁화가 두 개 달린 모자. 육군 중령으로 예편하셨다.

아버지 상처의 비밀은 한참 뒤에 들을 수 있었다.

“압록강까지 진격했다가 1·4 후퇴 때 중공군에게 쫓겨 내려오는데 왜관 근처에서…”

어릴 적 길거리에선 상이군인을 자주 볼 수 있었다. 한쪽 손에 손 대신 갈고리를 쓰거나, 한쪽 다리로 목발을 짚고 텅 빈 구겨진 바짓가랑이를 흔들며 애들에게 거칠게 소리 지르는 상이군인들. 멀리서 그 모습이 보이면 겁이 나서 도망쳐 다니곤 했다. 젊은 나이에 전쟁터에서 팔다리를 잃은 채 돌아와 팽개쳐진 그들의 원망과 슬픔, 돌아보지 않는 나라에 대한 분노 때문이라는 걸 어린아이인 내가 알 리 없었다.

교사로 재직하던 시기의 어머니
교사로 재직하던 시기의 어머니

신여성이었던 어머니

엄마는 신여성이었다. 일찌감치 친척의 초청으로 일본에 건너가신 외할아버지 덕에 네 살에 일본으로 간 엄마는 히로시마여고보를 다니며 의사가 되는 꿈을 키웠다. 8·15 광복이 되자 한의사인 외할아버지는 식솔을 거느리고 조국으로 돌아왔다. 사업 밑천을 준비해 돌아온 외할아버지는 혼란기에 전 재산을 사기당하고, 그 여파로 병을 얻게 되었다. 팔 남매의 맏이인 엄마는 한 달을 준비해서 교사 임용고시를 치렀다. 곧 선생님이 되어 소녀가장으로, 집안을 떠맡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가난과 혼란 속에서도 배워야 산다는 일념으로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다. 군인이었던 아버지와 결혼한 엄마는 전쟁이 끝나고 예편한 아버지의 사업이 부침을 거듭하자 다시 학교에 복직하였다. 내가 중학생, 막내는 겨우 젖먹이를 면할 때였다. 가족을 떠나, 시골 면 소재지 학교로 부임하였다. 집안 살림은 할머니가 도맡으셨다. 엄마가 떠나가고 첫 여름방학. 엄마는 당직을 다 하고 내려오신다고 했다. 처음 혼자서 시외버스를 타고 엄마의 근무지로 갔다. 텅 빈 교정에서 엄마가 치는 풍금 소리와 둘이서 부르던 동요들. 섬집 아기, 과꽃, 나뭇잎 배…. 노래를 부르며 엄마 몰래 손가락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그때 쏟아지던 매미 울음소리가 아직 귓가에 쟁쟁하다.

아버지는 마지막 직장인 학교로 돌아갔다. 엄마는 정년이 될 때까지 교단에 서셨다. 퇴직 후에도 스포츠센터에 매점을 열어 핫도그· 어묵 등을 팔며 하루도 일을 멈추지 않으셨다. 의과대학을 다니는 남동생과 두 여동생 학비를 대기 위해서였다. 시간이 흘러 남동생이 병원 개업을 하고 학비 걱정이 끝나고서야, 엄마의 일도 끝이 났다. 이제 아들 덕에 용돈도 받아 처음으로 취향에 맞는 멋진 가방 하나를 오랜 시간 발품을 팔아 찾아내셨다. 이탈리아 어느 공방 장인의 손끝에서 탄생했을 검은색 악어가죽 백. 평생 가족을 위해 사셨던 엄마의 마지막 호사. 이제는 유품이 되어 나의 장롱에 놓여 있는 핸드백. 엄마는 그 호사의 시간을 충분히 누리지도 못하신 채 떠나셨다.

나라의 기틀을 닦고 국민들이 절대 가난에서 벗어나 먹고 사는 일이 해결되는 시간이 왔다. 지난 시절을 돌아보고 공과를 가리며 뿌리를 바르게 세우는 일은 가정이나 나라가 다르지 않은가 보았다. 뒤늦게 보훈처로부터 두 건의 ‘은성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되었다.

군번 15510, 육군본부 육군 대위 강석후. 1952년 11월 10일

군번 15510, 제3보병사단 육군 중위 강석후, 1951년 4월 19일

머지않아 절차가 진행되어 부모님을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날, 온 가족이 모여 부모님을 조국의 품으로 돌려 드리려 한다. 꿈에도 잊지 못하시던 나라의 품에 전우들과 함께 편히 잠드시길 기원하며, 스물다섯 명의 가족이 모두 모여 두 분께 인사드릴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