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가족] 홀로 세 아들 키운 유성자 씨
[그래도 가족] 홀로 세 아들 키운 유성자 씨
  • 박영자 기자
  • 승인 2023.04.27 14: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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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잃고 시어머니에 의지, '가장'의 무게 견딘 시간
은행 지점장, 대표, 변호사...잘 자라준 아이들 고마울 뿐
만학도 공부하며 봉사활동
세 아들과 시어머니를 모시고 나선 나들이. 유성자 씨 제공
세 아들과 시어머니를 모시고 나선 나들이. 유성자 씨 제공

벚꽃이 너무 예뻤다. 초록 잎이 고운 날, 훌륭하고 장한 엄마 유성자(대구 중구 대신동·70) 씨가 사는 아파트를 방문했다. 현관을 들어서는 순간 천생 여자임이 느껴졌다. 집 안은 정리 정돈되어 있었고, 아기자기한 살림살이로 채워져 있었다. 거실 가득 채워진 대통령 표창장을 비롯한 많은 상장이 그가 얼마나 많은 사회활동과 봉사를 해왔는지 한눈에 보인다.

방 한 칸을 화실로 만들어놓고 그녀만의 여유로움과 자기를 아끼고 즐기며 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사고로 떠난 남편

군인이던 남편은 교육받으러 대전으로 떠났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갑자기 일어난 사고로 ‘국가유공자’라는 새 이름만 남겨두고 그렇게 가족 곁을 떠나갔다. 그녀의 나이 서른셋, 첫째가 초등학교 5학년, 이어서 둘째, 막내아들이 네 살이었다. 갑작스러운 남편의 죽음 앞에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힘든 나날을 보내며, 먹고 살아야 했기에 어린 막내를 데리고 장사에 나섰다. 익숙하지 않은 장터. 어깨에 짊어진 ‘어머니’라는 이름의 무게에,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시할아버지, 시부모님과 함께 대가족이 생활하다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서문시장에서 작은 가게를 하는 시어머니와 남겨진 아들 삼 형제가 고스란히 그녀의 몫이 되었다. 시어머니 뒷바라지에 아침저녁으로 밥을 해 나르며 아이들을 키우고, 가게 일을 도우면서 억척스럽게 살았다. 매일 고된 일상에 남편 생각은 사치였다. 그래도 든든한 시어머니 덕분에 힘든 줄 모르고 의지하며 살았다. 빠듯한 생활에 매일 일을 해야 하였기에, 단돈 한 푼도 자신을 위해 쓸 수 없었다. 자식들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 싫어 늘 ‘강한 어머니, 강한 여자’임을 되뇌었다.

속은 여리지만, 겉은 강한 어머니

연신 앨범을 뒤적이며 그때는 나도 참 예뻤다며 웃는다. “이제 보니 내가 정말 예뻤네"라며 웃다가, 말꼬리가 흐려진다.

가족사진 한 장 고르려고 해묵은 사진첩을 내놓고 보니 변변한 가족사진 한 장이 없다면서 허탈해한다. 먹고살기 바빠 가족사진 같은 건 엄두도 내지 못했다. 절대 남들 앞에서 울지 말고 ‘탓하기보다는 더 강해지자’라며 자신을 채찍질했다.

‘신랑 없이 잘 키웠다’는 그것만이 보상이라 생각하고 이를 악물었다. 고생했지만, 최선을 다했다. 자식들에게는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더 잘해 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다. 다행히 아들 셋은 말썽부리지 않고 묵묵히 자기 일을 잘해 주었다. 영민하게 자기 앞가림 잘하는 아들 덕택에, 학교에 가면 오히려 귀한 대접을 받았다. 큰 탈 없이 잘 자라준 아이들이 그저 고맙기만 하다.

아이들 학교 행사에 함께한 유성자 씨와 아들. 유성자 씨 제공
아이들 학교 행사에 함께한 유성자 씨와 아들. 유성자 씨 제공

어머니로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읜 막내는 딸처럼 싹싹하게 엄마인 그녀를 따랐다. 그 막내아들이 서울대학교에 합격했을 때, 그녀는 참 많이 울었다. 그 후 변호사시험에 합격하고 변호사가 되었을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첫째는 지금 은행 지점장이 되었다. 엄마에게는 무조건 최고를 해주고 싶어 하는 맏아들. 지금부터라도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사시라며, 그렇게 사셔야 나중에 우리가 후회하지 않는다며 주문한다.

둘째 아들은 일본에서 40여 명의 직원들과 함께 IT회사를 운영 중이다. 얼마 전 허리 수술을 하며 입원해 있을 때에도, 둘째 아들이 달려와 병간호했다. 멀리 있어 자주 뵙지도 못한다며, 간병인도 마다하고 수발을 들었다. 여전히 목돈은 자기 몫이라며, 말만 하라는 아들이 고맙다.

그래도 여전히 남편은 나와 함께 있으며 나를 살린다. 국가유공자 연금만으로도 혼자 살기에는 충분하다.

가족의 의미

작년 서울에서 허리 수술을 받았을 때, 아들과 손자들이 번갈아서 간호하는 모습을 보며 주위에서 부러워했다. 몸은 아팠지만, 마음은 더없이 행복했다. 두 달 동안 둘째는 병실에서 업무를 보며 함께했고, 아들과 며느리들은 아기 다루듯 보살폈다. 수없이 감사 기도를 올리며, 퇴원하며 수고했다고 아들· 손자· 며느리까지 모두 1백만원씩 건넸더니, 그 돈이 다시 고스란히 이자를 붙여 돌아왔다.

아이들은 늘 이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은 ‘우리 엄마 유성자’라고 한다. 그 험한 시간을, 세상을 살아온 것도 ‘가족의 힘’이다. 가족은 존재 이유이자,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반찬을 만들어 택배로 보내주면 며느리가 맛있게 잘 먹었다며 빈 반찬통을 사진 찍어 카톡으로 보내준다. ‘어머니 최고’라는 한마디에 삶의 보람을 느낀다. 내가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그래 엄마는 건강하게 살면서 너희들 곁에서 잘 지켜줘야겠다는 사명감도 들고 신이 난다.

만학도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복지관과 이웃 어르신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는 성자 씨. 여전히 건강하게 봉사활동을 하며, 아이들이 부끄럽지 않은 어머니로 살아가고 싶다고 얘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