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어날 추억] (57) 전통 혼례 2
[꽃 피어날 추억] (57) 전통 혼례 2
  • 유병길 기자
  • 승인 2022.03.26 1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하면서 신방엿보기, 새신랑 달기 등 전통 혼례 풍속이 사라졌다.
전통 혼례 후 찍은 가족 사진. 유병길 기자 

결혼식 날은 하루 종일 바쁘고 즐겁고 행복한 날이였다. 저녁을 먹고 밤이 깊어가면 신랑은 신부가 있는 방에 들어갔었다. 합환주 상이 들어가면 신랑 신부는 마주 앉아 술을 한 잔씩 주고받아 마셨다. 신랑이 신부 머리에서 족두리를 내리고 비녀를 뽑고 옷고름을 풀면서 호롱불을 끄고 첫날밤을 잤었다.

문종이를 뚫고 신방을 였보았던 풍속. 유병길 기자 

친척들이 방문 앞에 서서 손가락에 침을 묻혀 문종이를 뚫고 신방을 엿보는 풍속이 있었다. 풀을 먹인 새 이불은 조금만 움직여도 버석버석 소리가 났다. 신부는 오늘 처음 만난 신랑이 좋을 수도 있고 마음에 안 들 수도 있다. 마음 급한 신랑이 다가오면 도망가는 소리가 밖에서도 다 들렸다. 이때부터 밖에 있는 사람들은 방 안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며 웃기도 하였다. 어떻게 하라고 코치하고 신랑 신부를 괴롭혔다. 친척이 많은 집안에서는 문객들이 신랑 신부를 골탕 먹이는 예도 많이 있었다. 겨울에 방문의 문종이를 다 찢고 방문 앞에서 솔가지에 불을 붙여 키로 연기를 방안에 불어 넣었다. 어떤 집에서는 왕겨 연기를 풍구를 돌려 방안에 넣기도 하고, 부엌에서 계속 불을 지펴 뜨거워 잠을 못 자게도 했다.

이튿날 신랑은 집안 친척들과 인사도 하고 술을 먹었다. 이때 새신랑을 많이 괴롭히며 새신랑 달기를 하였다. 신랑의 발목을 새끼나 끈으로 묶어서 선 사람이 어깨에 걸고 당기면 신랑은 어깨와 머리 부분만 바닥에 닿아서 괴로워하였다. 방망이로 신랑 발바닥을 때리면 힘들어하였다.

“장모님 사위 살려 주세요”

소리치면 장모가 맑은 청주와 고기 안주로 술상을 새로 내왔다.

“맛있는 술과 안주를 많이 가져왔으니, 내려놓게”

“아주머니, 형수님, 어제 도둑맞은 처녀 도둑놈 잡았습니다.”

또 때렸다.

“흥이 없어서 술맛이 없으니, 새색시 노래 듣고 싶습니다.”

새색시를 나오라고 합니다. 안 나오면 줄을 더 당기면서 발바닥을 치면 신랑은 고통이 더 심하였다.

첫날밤을 지낸 새색시는 아저씨, 오빠들 보기가 부끄러워 나가기 싫지만, 신랑의 신음소리는 점점 커졌다. 새색시가 나와서 노래를 불러야 첫 만남의 장난은 끝이 났다. 술김에 장난이 너무 과격하여 신랑이 다치는 불상사도 가끔 있었다. 삼 일째 되는 날에는 성씨가 다른 동네 청년들이 와서 신랑을 달았다. 신부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많이 내어 동내 청년들을 대접하였다. 신부한테 연민의 정을 품고 있었거나, 짝사랑을 한 총각은 다른 사람보다 더 짓궂게 신랑을 괴롭혔다.

전통 혼례가 현대식 예식장 혼례로 바뀌면서 신방 엿보기, 새신랑 달기 등 전통 풍속은 사라졌다.

신부집에서 전통 혼례를 하고 빠르면 삼 일 후에 신행을 하였다. 형편상 늦으면 몇 달, 일 년 후에 시집으로 신행을 가는 신부도 있었다. 신행하는 날이 신랑집에서는 잔칫날이다.

사인교(가마의 밑부분)와 요강

신행을 갈 때는 가깝거나 멀거나 친정집에서 시집까지 가마를 타고 갔었다. 신부는 예쁜 옷을 입고 얼굴에 연지 곤지를 찍고 갔다. 가마를 메는 사람은 네 명이나 팔 명이 교대로 메고 갔다. 가마 속에는 요강을 가져가면서 신부가 급할 때는 안에서 볼일을 보았다.  신부의 옷과 혼수, 이바디 음식은 일꾼들이 지게에 지고 따라갔었다.

 어른들께 폐백을 드리는 모습. 유병길 기자 

신부가 가져간 이바디 음식(반찬)으로 시부모님과 시댁 가까운 어른들에게 폐백을 드리고 안방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방이나 마당에 멍석을 펴고 손님들에게 잔치국수와 술 고기를 마음껏 먹도록 접대를 하였다. 잔치국수를 끓여내고, 과방에서 음식을 차려 준비한 목기나 쟁반에 담아냈다. 배가 고프다가 음식과 술을 많이 먹었고, 술 취하여 밖에서 자는 사람도 많았다. 뱃속에 기름기가 없는 상태에 돼지고기 몇 쪽을 먹고 배탈이 나서 설사를 하는 사람도 많았다. 이튿날 아침에는 신부가 가져간 반찬으로 시부모님께 첫 밥상을 차려드렸다.

옛날에도 결혼식을 하면 결혼사진을 찍었다. 1950년대 후반 면 소재지에 사진관이 있었는데, 조금 살기가 좋은 집에서는 결혼식 회갑연 등 큰일이 있을 때는 사진사를 불러 집에서 사진을 찍었다. 사진 찍을 준비가 되면 사진사가 “하나” “둘” “셋” 하며 기구에 넣은 마그네슘 가루를 터트려 밝은 불꽃이 ‘번쩍할’ 때 사진을 찍었다. 전기가 들어오면서 전기 스파크로 마그네슘을 터트리다, 밝은 전구 여러 개로 바뀌었다.

1960~90년대 사진 산업이 성수기일 때는 한 골목에도 몇 개씩 사진관이 있었다. 디지털 카메라가 나오고 젊은이들이 컴퓨터에 사진을 저장하면서 앨범이 없어지고,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하나 둘 문을 닫기 시작한 사진관. 요즘은 길거리에서 사진관을 찾기가 어렵다.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동네 사진관은 자기 점포에서 노인들이 운영하고 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 디지털 IT 시대로 바뀌면서 없어지는 것이 사진관뿐이겠는가? 너무나 큰 변화가 왔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