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어날 추억] (54) 출생과 회갑 잔치의 변천
[꽃 피어날 추억] (54) 출생과 회갑 잔치의 변천
  • 유병길 기자
  • 승인 2022.02.25 1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린아이 출생률이 높을 때는 평균수명이 낮았으나, 출생률이 낮아지면서 평균수명이 높아 지면서 돌잔치와 회갑 칠순잔치의 변천사를 경험하며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아기를 낳으면 삽짝(대문)에 걸었던 금줄. 유병길 기자

1950~60년대에는 봉강리(경북 상주시 외서면)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아주 열악한 환경에서 힘든 삶을 살았다. 이때는 아들딸 결혼을 일찍 시켰던 때이고 피임방법이 없어 아이가 생기는 대로 낳다 보니, 며느리와 같이 아이를 낳는 시어머니들이 많아 조카보다 나이가 적은 삼촌이 많았다.

아기를 낳고 나면 대문에 금줄(새끼줄)을 걸어서 다른 사람들이 집에 못 들어오게 하여 부정이나 병원균의 전염을 막았다. 금줄은 왼쪽으로 비벼 새끼를 꼬았으며 아들을 낳으면 붉은 고추와 숯을 꽂았고, 딸을 낳으면 솔가지와 숯을 꽂아 아들인지 딸인지 보는 사람들이 알게 하였다.

농촌의 모든 산모는 아기를 집에서 낳았다. 산통이 오면 방 아랫목에서 헌 옷을 깔고 치마를 입은 채로 시어머니, 이웃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아기를 낳았다. 밭에서 일하다가 아기를 낳는 일도 많았는데 탯줄은 낫으로 잘랐다. 탯줄을 소독하지 않은 기구로 자르다 보니 불상사가 많았다. 아기가 거꾸로 나올 때는 탯줄을 아기 발가락에 걸어두면 아기가 돌아서 나온다는 말도 있었지만, 산모와 아기가 잘못되는 일이 많았다. 환경이 열악하고 위생 관념이 부족하던 때라 아기를 깨끗하게 씻기지 않아서 크면서 피부나 손발이 거칠다는 말도 있었다.

어려운집의 산모는 이튿날부터 가마니를 짰다. 유병길 기자

조금 먹고살기가 괜찮은 집은 한 칠(7일) 산후조리를 하였으나, 먹고 살기가 어려운 집의 산모는 아기를 낳은 이튿날부터 명주, 삼, 베를 짜고, 가마니를 짜고, 새끼를 꼬았으며, 들일도 하였다.

첫 돌이 되기 전에 아기 다섯이 죽게 되자, 용하다는 무속인에게 물으니 “화장실(뒷간) 같은 천박한 곳에서 가마니를 깔고 아기를 낳아라” 말을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실천하여 아들을 키웠다는 분들도 있었다.

산모가 미역국과 쌀밥을 잘 먹어야 젖이 잘 나와서 아기가 잘 자랐다. 그러나 양식이 부족하여 배부르게 먹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산모들이 배부르게 많이 먹지 못하여 첫돌 전에 젖이 잘 안 나오는 분들이 많았다. 젖이 잘 나오게 산모에게 돼지 발을 사다가 삶아주었고, 막걸리를 한 사발 마시면 젖이 많이 나온다고 한 잔씩 하는 산모도 있었다.

갓난아기의 삶과 죽음은 전염병 홍역(홍진)이 좌우하였다. 홍역 예방치료 방법이 없었던 시기에는 홍역을 하여야 사람 구실을 한다고 ‘자식 농사를 반타작한다’ 옛말이 있었다. 홍역을 하고 난 후에 출생신고를 하다 보니 호적상 나이가 적은 사람들이 많았다. 전염병 천연두(마마)를 앓다가 얼굴에 흉터가 생긴 곰보도 많았다.

77년의 백일사진이다. 유병길 기자

50년대 백일잔치는 아기가 100살까지 건강하게 살라고 100집에서 쌀 한술씩 얻어 쌀을 빻아 체로 쳐서 떡(백설기)을 만들었다. 미역국에 쌀밥, 떡을 소반에 차려 삼신할머니께 아기가 무탈하게 잘 자라도록 빌었다. 백일 떡은 여러 집에 나누어 드렸다. 가족들이 모여 쌀밥에 미역국을 먹으며 백일잔치를 하기 시작하였다.

60년대 후반에는 면 소재지에는 아기를 받아주는 산파가 있었다. 산파는 젊었을 때 간호사를 하였던 분들이 하였다. 산파가 아기를 받으면서 탯줄을 자르는 가위와 묶는 실을 삶아서 사용하였다. 입소문으로 일반가정으로 퍼져나가면서 가위와 실을 삶는 소독을 하였다. 산통이 시작되면 가정 형편이 조금 좋은 집에서는 산파를 불렸다. 보통 가정에서는 가족의 도움으로 아기를 낳았다.

이때부터 산후조리도 삼칠일(21일)까지 하게 되었고, 천연두 홍역 예방접종을 시작하면서 곰보도 없어졌고, 홍역으로 죽어가는 아이도 없었다.

첫돌에는 수수떡을 만들었다. 붉은팥과 수수는 붉은색을 띠므로 열 살까지 생일 때 수수떡을 하여주면 잡귀나 나쁜 액을 막아 준다고 믿었다. 첫돌 잔칫상에 미역국, 쌀밥, 백설기, 수수떡, 실타래, 붓, 돈을 놓고 두 손을 비비며 삼신할머니께 무탈하게 잘 자라도록 기도를 하였다. 돌상 앞에 아기를 앉혀 아기가 앞에 놓인 것을 잡게 하였다. 실타래를 잡으면 오래 살고, 붓을 잡으면 선비가 되고, 돈을 잡으면 부자가 된다고 믿었다.

아기 덕분에 가족들이 쌀밥에 미역국 떡을 먹었으며, 백설기와 수수떡은 가까운 친척과 이웃에 나누어 주었다. 돌떡을 받으면 그냥 넘어갈 수 없어 돈을 주거나 선물을 주었다. 첫돌잔치 때는 사진을 찍기 시작하였다.

60년대 삼포리 노래댁의 회갑연. 막내딸 제공

그때는 회갑(61세)까지 사는 분들이 적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시면, 자식들은 반드시 회갑 잔치는 해드렸다. 축의금 대신 현물로 두부 묵 한판, 술 한 동이, 시루떡 한 시루 등을 주고받았다. 80년대 친구는 어머니 회갑 잔치를 고향에서 하였다. 직장의 직원들과 친인척 동민들이 많이 오셨다. 음력 동짓달 보름은 추워서 마당 옆에 간이 비닐하우스를 짓고 오시는 손님들이 앉아서 음식을 먹고 쉴 수 있게 하였다.

90년대부터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회갑 잔치를 하지 않고 칠순 잔치를 하였다. 2000년부터는 칠순 잔치도 하지 않고 가족 여행을 가는 것으로 대신 하였다.

21년 11월 22일 산부인과에서 3.4kg 태어난 신생아 사진. 아기 부 제공
21년 11월 22일 산부인과에서 3.4kg 태어난 신생아 사진. 아기 부 제공

아이를 적게 낳으면서 어른들의 평균 수명이 길어지다 보니 부모님의 회갑, 칠순 잔치는 하지 않고 아들(손자), 딸(손녀)들의 돌잔치는 음식점, 회관을 빌려 성대하게 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2005년 첫돌 사진이다. 유병길 기자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