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어날 추억] (58) 여인들의 애환
[꽃 피어날 추억] (58) 여인들의 애환
  • 유병길 기자
  • 승인 2022.03.30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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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두손으로 모든일을 힘들게 하였던 여인들의 삶.
삼베를 짜던 베틀. 유병길 기자

1950~60년대 봉강리(경북 상주시 외서면)의 여인들은 너무나 힘든 삶을 살았었다. 남편이 있는 여인들도 살아가기에 힘들었지만,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남편을 잃은 미망인들은 더 힘든 삶을 살았었다.

대가족제도에서 시집살이하며 부족한 양식으로 음식을 만들고, 베 삼베 명주를 짜고, 옷을 만들어 입히고, 농사일하며 아기를 키우는 등 모든 것을 작은 두 손으로 만들었다. 그때의 여인들은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남자들은 주로 농작업과 땔감을 준비하면 여인들은 집안일을 하는 가정의 안 일꾼으로 힘이 적게 더는 농사일도 도왔다. 봄에는 보리밭에 풀을 뽑고, 봄누에를 치고, 여름에는 콩밭을, 가을에는 가을누에를 치고, 붉은 고추를 따고, 목화송이를 뽑아 모으고, 참깨 들깨를 수확하였다. 미망인들은 어린 자식을 먹이고 키우기 위하여 남자들과 같이 들일을 다하였다. 들에서 늦게 집에 들어왔는데 내일 아침밥을 지을 양식이 없으면, 밤늦게까지 디딜방아로 ‘쿵덕’ ‘쿵덕’ 방아를 찧어 보리쌀과 쌀을 만들었지만, 남자들은 도와주지 않았다. 집 집마다 우물이 없어서 컴컴한 새벽에 작은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공동 우물에서 물을 이고 와서 부엌에 있는 물독에 물을 가득 채우고, 아궁이에 불을 피워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아침밥을 하였다. 이때 남자들은 부엌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집안에 부모님 조부모님 빈소가 있으면 아침저녁에 먼저 밥상을 빈소에 올리고 다시 밥상을 차려 방이나 마루에 남자들이 먹도록 밥상을 차려주었다. 여자들은 밥상도 없이 부엌 바닥에 반찬을 놓고 둘러앉아서 밥을 먹었는데, 각자 그릇도 없이 큰 바가지 아니면 양푼에 밥을 퍼서 나물을 많이 넣고 비벼서 같이 먹었다. 남자와 여자의 성차별이 심할 때였다. 이삼십 년이 지난 후에도 남편과 겸상을 차려 와도 스스로 바닥에 내려놓고 먹었으니, 몸에 밴 습관이라고 할까요?

명절이나 제사 결혼식 회갑 등 큰일이 있을 때는 모든 음식을 집에서 만들었다. 맷돌에 콩을 갈아 두부, 메밀을 갈아 메밀묵, 도토리를 갈고 물에 감가 우려내고 도토리묵을 만들었다. 절구나 디딜방아에 쌀을 빻아 쌀가루를 만들고 시루에쪄서 가래떡과 절편을 만들었고, 찹쌀을 쪄서 떡메로쳐서 인절미를 만들었다. 전을 부치고 여러 종류의 재료를 굽고 조리고 무쳐서 음식을 만들었다.

조기, 문어 등 어류와 고기는 시장에서 사고 그 외 모든 것은 집에서 준비하기 때문에, 큰일 한 달 전부터 하루 전까지 매우 바빴다. 그날부터 며칠은 손님 접대에 또 힘이 들었다. 남자들은 방안에 앉아 놀면서 손님 올 때마다 같이 먹어 치우는 소비자인 동시에 왕이고, 여인들은 부엌에서 서거나 꾸부리고 쪼그리고 앉아서 연기가 매워 눈물을 흘리면서 일일이 솔가지로 솥에 불을 피워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식모였다.

등잔과 호롱의 모습이다. 유병길 기자

여인들은 일류 디자이너이고 재봉사였다. 누에고치로 명주를, 삼으로 삼베를, 목화로 베를 일 년 내내 짜서 팔거나, 물감을 들이고 희게 표백하여 명절이나 큰일이 있을 때 가족들의 한복을 재단하여 옷을 직접 만들어 입혔다. 안방 윗목 경대 옆에는 반짇고리가 있었다. 반짇고리에는 크고 작은 바늘이 꽂혀있는 바늘꽂이, 실이 감겨있는 실꾸리, 가위, 골무, 자 등이 담겨 있었다. 자주 안 입는 옷은 고리짝에 넣어 두고, 자주 입는 옷은 해태에 걸어 두고 입었다. 한복을 새로 만들거나 세탁하여 다듬잇방망이로 ‘똑딱’ ‘똑딱’ 두드려 손질하였다. 명절 며칠 전부터 집집마다 울려 퍼지는 방망이 소리는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 옷을 새로 만들 때나 옷을 손질할 때는 희미한 호롱불 밑에서 밤잠을 설쳐가며 고생하셨다. 어른, 아이들 옷까지 다 집에서 만들었다.

글을 좀 읽었고 면 단위 행사에 출입하는 사람, 즉 양반집 선비들은 첩(둘째 부인)을 많이 두었다. 첩이 있어야 행세를 한다고 하였다. 첩을 집에 데리고 와서 같이 사는 사람도 있었고, 술집 주모를 첩으로 둔 남자는 외박을 밥 먹듯이 하다가 나중에는 거기서 살림을 시작하였다. 첩한테 태어난 아들을 집에 데려와서 키우기도 하였다. 애를 구박하거나 첩 때문에 잔소리를 하다가는 주먹이 날라 왔기에 부인은 참고 살 수밖에 없었다. 속을 태운 본부인의 가슴속은 검게 탔을 것이다.

한방에서 여러 명이 잠을 자야 하는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아기는 어떻게 생겼는지? 피임법이 없던 그 시절에는 임신은 계속되어 쉰둥이까지 낳았다. 적게는 육칠 명에 많게는 십여 명까지 며느리와 같이 아기를 낳았다. 홍역 등 열악한 환경으로 태어난 숫자에서 절반 정도만 살아서 성장하였으니, 여인들의 가슴에는 큰 멍이 들었을 것이다.

옛날에 사용하였던 빨래 방망이와 빨래판. 

모든 일이 다 힘들었겠지만, 그중에서도 겨울철에 맨손으로 얼음을 깨고 얼음물에 빨래하는 일이 힘들었단다. 무명옷이나 애들 기저귀를 희게 세탁하려면 비누칠을 하거나 양잿물(가성소다)을 넣고 삶아야 하는데, 돈이 없어 그것을 못 살 때는, 짚 잿물을 받아서 사용하였다. 볏짚 태운 재를 대나무 소쿠리에 담아 큰 항아리 위에 나무를 걸치고 올려놓고 소쿠리에 물을 부어 내려오는 물(잿물)에 옷가지를 치대고 삶았다. 항아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냇가나 웅덩이 얼음을 깨고 납작한 돌 위에 빨래를 놓고 방망이로 두드려 빨래하였다. 찬물에 손과 온몸이 얼어서 감각이 없을 때가 있었단다. 60년대 긴 나무판에 골이 파인 빨래판이 나와 조금은 쉽게 빨래를 빨았다. 겨울에 손가락이 갈라져 피가 날 때는 소기름 덩이를 호롱불에 녹여 갈라진 곳에 발랐다.

양식은 떨어졌는데 밥을 달라고 우는 아이들을 달랬던 일이 제일 힘들었단다. 지면에 다 열거 못 하지만 여인들의 고통이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90대 이상 할머님들은 체험하신 산 증인이고, 70대 후반 세대까지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힘들게 일하며 살아오신 것을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