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채보상운동 115주년 기념전시회
국채보상운동 115주년 기념전시회
  • 유병길 기자
  • 승인 2022.03.0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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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 21일 독립지사 서상돈, 김광제 선생. 등의 제안으로
대구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번진 주권 수호 운동이다.

 

국채보상운동 115주년 기념전시회가 3월 1일부터 3월 6일까지 대구문화예술회관 2층 12전시실에서 개최된다.

국채보상운동을 적극 지원한 국내 언론지. 「대한매일신보」 · 「황성신문」· 「제국신문」·「경향신문」등

 

국채보상운동은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화 하기 위해 정치·군사적 침략과 아울러 경제적 침략을 단행하자 이에 대항해 경제적인 자주권을 회복하여 국권을 수호하자는 운동이다. 러일전쟁에서의 승리와 을사늑약 등을 통해 한반도에서 정치·군사적 지배권을 확보한 일본은 한국의 경제를 식민지화하기 위해 차관을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05년부터 1910년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대일부채는 4,500만원에 달하였다. 이런 막대한 차관은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들어 온 것이 아니라,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화하는데 사용될 일제의 식민지 건설비용을 모두 한국 정부에 전가시키기 위한 계략이었다. 국채보상운동은 이와 같은 차관의 이면에 담긴 일제 침략성을 심각히 깨닫고 우리 국민 스스로의 힘으로 부채를 갚아 민족의 생존권을 지켜나가기 위해 일어났다.

국채보상운동은 담배를 끊어 외채를 갚자는 운동으로 대구 광문사의 김광제와 서상돈을 중심으로 발의되었다. 1907년 2월 21일 대구 군민대회를 통해 본격적인 국채보상운동의 닻을 올리자, 전국 각지와 국외에서 그 취지에 찬동하면서 전국민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남성들은 담배를끊은 돈으로 국채보상의연금 모집에 동참했고, 여성들은 솔선하여 금·은 패물을 처분하여 동참했다. 「대한매일신보」 · 황성신문 · 「제국신문」·「경향신문 등 국내 언론들은 국채보상운동을 적극 선전하여 확산시켰고, 특별히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은 이 운동을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시키는데 앞장섰다.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김광제(좌측), 서상돈(우측). 대한매일신보를 통하여 전국적으로 확대시킨 양기탁.

대구광문사와 광문회는 어떤 곳인가? 대구광문사와 광문회는 김광제의 건의에 의해 대구의 거상 서상돈 등 십수 명이 돈을 모아 만든 것이다. 1906년 1월에 설립된 광문사는 신교육계몽운동을 전개하는데 필요한 교과서는 물론 계몽잡지나 신문, 교양서적 등을 발간, 보급하기 위한 인쇄소이며 광문사 안에 경북도 내 각 군 유지 400~500명으로 문회를 두어 활동방향을 결정하였다. 김광제는 본시 충남 보령인으로 1888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첨정 비서원승, 호남시찰사 동래경무관을 역임하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울분하여 경무관을 사임하고 친일배의 간흉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되었다. 그 후 애국충정이 인정돼 곧 사면되어 대구로 와서 서상돈 등과 함께 학교설립을 통한 민족계몽 운동을 펼쳤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에서 활발히 전개되자 일제는 이 운동의 확산을 막기 위해 민족언론을 탄압하고, 양기탁을 국채보상금횡령이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시키는 등 교묘하게 탄압하였다.

일제의 경제 수탈

 

일제의 계속된 탄압으로 1908년부터 운동의 열기는 쇠퇴하였다. 이와 같이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경제침투로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시기에 민족 경제를 보호하여 국권을 지키려 한 강력한 항일민족운동으로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오늘날 우리는 그러한 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하여 계속 발전시켜 나가야할 것이다.

독립운동 자금후원 활동.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적인 애국운동으로 빈부귀천, 남녀노소, 도시농촌, 종교사상을 뛰어넘어 전 국민이 참여하여 애국정신을 크게 고양시켰다. 특히 여성들이 열성적으로 참가하여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켰다. 또한 노동자, 인력거꾼, 기생, 백정 등 하층민들까지도 운동에 참여한 그야말로 범 국민적인 운동이며,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1907년 4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였다. 국채보상운동은 최초의 민간주도 캠페인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민족의식의 산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민간주도 캠페인은 1997년 IMF구제금융이라는 위기상황 때 경제적 주권을 지키기 위해 금모으기 운동과 외화 모으기 운동의 정신적 바탕이 되었다.

조선물산장려운동은 민족경제를 건설하여 주체적인 항일 역량을 키우려는 목적에서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1920년 8월 평양에서 조만식, 김동원 등 기독계와 교육계 유지 70명의 발기로 시작된 이 후, 1923년 1월 조선물산장려회가 서울에서 창립면서 전국적인 운동으로 하였다.

국채보상 운동 기념비.

국채보상의 값진 정신을 다시 살려 나라를 사랑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