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뀌풀과 역사에 얽힌 이야기들
여뀌풀과 역사에 얽힌 이야기들
  • 여관구 기자
  • 승인 2021.12.3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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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뀌는 염색하거나 음식의 향신료, 심지어는 약재로 이용하는 등 식물체 전체가아주 유용한 자원이다. 무엇보다도 역사적인 요리서인 15세기 중엽의 "산가요록"은 가장 자주 이용되는 들풀 가운데 하나가 여뀌라는 사실을 전한다.
분홍색의 여뀌풀꽃.  여관구 기자.

여뀌풀꽃의 꽃말은 ‘날 생각해 주렴’이다. 어린 시절 여뀌풀을 돌로 찌어서 물에 풀면 물고기들이 기절하여 떠오르면 잡던 추억의 풀이다. 한해살이로 바로 서서 자라고 마디가 팽창한 것처럼 굵어지며 적색을 띤다. 줄기를 싸고 있는 턱싼잎(托葉鞘)에 털이 있다. 식물체 전체에 매운 맛이 있다. 잎은 좁고 긴 편이며 양면에 작은 선점(腺点)이 밀생하고 떡잎 수준에서도 매운 맛이 난다. 가을에 화려한 적색을 띤다.(비교: 바보여뀌(Persicaria pubescens)는 줄기에 털이 있고, 잎 중앙이 약간 넓으며 흑색 반점이 있다. 씹어도 맵지 않다.) 꽃은 7~10월에 피며 송이모양 꽃차례(總狀花序)로 황녹색이지만 끝부분은 적색을 띠고 투명한 선점(腺点)이 밀생한다. 윗부분 꽃차례는 약간 아래로 처진다. 열매는 여윈열매(瘦果)로 짙은 갈색이다. 서식처는 습지 언저리, 물가, 도랑, 하천 바닥, 하천 제방 등에서 주로 서식을 한다.

하천에 서식하는 어린 여뀌풀.  여관구 기자.

여뀌는 아시아 전역에 걸쳐서 광역 분포하며 주로 난온대의 온난한 기후지역을 중심으로 널리 분포한다. 여뀌는 마디풀과에 속하는 한해살이풀로 잎이 달린 줄기 부분에 마디가 뚜렷한 것이 특징이다. 물터 가장자리처럼 서식처가 아주 불안정한 곳, 즉 하천이나 개울가의 흐르는 물살에 의해 새롭게 만들어진 땅에서 살며 일시적으로 적합한 서식환경이 만들어지면 종자은행에서 일제히 발아해 군락을 만든다. 그러다가 물살이 다시 쓸어버리면 내년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다.

린네 박사가 부여한 여뀌의 학명(Persicaria hydropiper)은 그 형태와 생태 그리고 생리적 요소를 망라했다. 복숭아(Persica) 잎을 닮은 잎과 물기(hydro-)가 있는 땅에서 사는 것, 그리고 잎에서 매운 맛(-piper)이 나는 식물이란 의미다. 중국 상하이 바로 남쪽에 위치하는 제지앙성(浙江省)에서는 여뀌를 柳蓼(류료)라 하고 만주에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버들여뀌라고도 부른다. 여뀌 잎 모양이 버드나무를 닮은 데에서 비롯한다. 라틴어 속명이 복숭아 잎을 닮았다는 것과 대조적이지만 사실 버드나무 잎과 복숭아 잎은 그 외형에서 많이 닮았다.

흰색의 여뀌풀 꽃 모습.  여관구 기자.

여뀌는 일본사람들에게도 친숙한 종으로, 야나기따데(柳蓼)라고 부른다. 일본에는 “먹을 수 있는 풀이 아주 많은데, 하필이면 여뀌를 먹는 벌레도 있다(蓼食う虫も好きずき)”라는 속담이 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매우 다양해서 그 기호를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어린잎은 생선회 접시에 곁들이는 장식으로 이용하기도 하는데 여뀌 잎이 소화를 촉진하는 성질 때문인 듯하다. 약간 매운 맛은 입맛을 돋게도 하고 비린내를 덜게 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뀌 종류에 대한 인류의 이용 역사는 아주 오래다. 천연 염색의 대명사격인 쪽(Persicaria tinctoria)은 여뀌와 형제 사이다. 여뀌는 염색하거나 음식의 향신료, 심지어는 약재로 이용하는 등, 식물체 전체가 아주 유용한 자원이다. 이 가운데 여뀌는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진 종이다. 우리에게는 나물반찬에 더하는 주요 조미료로 어린잎을 데치거나 삶아서 먹었다는 생생한 기록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역사적인 요리서인 15세기 중엽의 『산가요록(山家要錄)』은 가장 자주 이용되는 들풀 가운데 하나가 여뀌라는 사실을 전한다.

집단으로 서식하는 여뀌풀 모습.  여관구 기자.

★이름의 유래 ; 한글명 여뀌는 엿귀, 엿귀 또는 엿긔, 엿괴에서 유래하고 역귀풀이라고도 전한다. 북부지방과 만주지역 방언으로 역귀, 들여뀌, 버들여뀌, 맵쟁이, 매운여뀌, 버들번지 따위가 있다. 이들 방언 가운데 맵쟁이란 정겨운 우리말이 눈에 띈다.

여뀌(엿긔)는 꽃차례에 작은 열매가 엮어져 있는 형상에서 비롯하는 이름으로 추정된다. 중국 한(漢)나라의 『회남자(淮南子)라는 고전에는 얽혀 있는 모양을 일컫는 蓼糾(요규)라는 명칭이 나온다. 여기에 여뀌를 지칭하는 蓼(요)가 들어 있으며 우리말 여뀌의 의미와 중국의 경우가 일치한다. 여뀌처럼 꽃대 하나에 종자 여럿이 줄줄이 매달려 얽혀 있는 형국을 빗대는 말일 것이다.

삼국유사(제2권) 가락국기(駕洛國記)에 여뀌(蓼)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김수로왕(金首露王) 즉위 2년(서기 43년) 도읍을 정하면서 왕이 말하기를 “이제 내가 도읍을 정해야겠다.” 고 하면서“이 땅은 마치 여뀌(蓼)잎처럼 좁기는 하나 산천이 빼어나고 기이하니 16나한(十六羅漢)이 머물만한 곳이다. 1에서 3을 이루고 3에서 7을 이루매 7성(聖)이 머물 만한 곳으로 적합하다. 이 땅에 의탁하여 강토(疆土)를 개척하면 마침내 좋은 곳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지금의 김해 땅의 지형에 대하여 묘사한 내용이다. 1905년 조선은 일본의 주도로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외교권(外交權)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으로 국권이 상실되었다. 나라를 잃은 백성들은 억센 생명을 이어가는 볼품없는 여뀌를 바라보며 희망을 잃지 않았다.

붉은색 여뀌풀 모습.  여관구 기자.

▶전설 1) 여뀌는 더러운 물을 정화하고, 잎맥과 반대방향으로 여덟 ‘팔(八)’ 자의 뚜렸한 반점이 있다. 이것을 보고 전설 같은 이야기를 지어 냈다. 여뀌 잎에 새겨진 ‘八’자 는 8월이 되면 우리나라가 해방이 된다고 하였다. 이 이야기는 전국에 확산되었으며 그래서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해방되었다. 우리 민족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가냘픈 여뀌 잎을 바라보며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전설 2) 여뀌로 중풍을 치료하였다는 옛 이야기도 있다. 어느 산촌에 노인이 중풍으로 누워 있었다. 지나가던 스님이 이를 보고 여뀌를 달여 마셔보라고 하였다. 노인은 여뀌 달인 물을 계속 마시는 동안 몸을 기동하게 되었고 중풍이 치료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여뀌의 유래로는 여뀌를 집 주변에 심어놓으면 그 여뀌 알맹이를 세느라 도깨비가 집에 못 들어오게 도깨비를 '엮는다고', '엮이게 한다'고 여뀌라는 유래가 있다.

하천에 서식하는 어린 여뀌풀 모습.  여관구 기자.

▶여뀌에 얽힌 이야기들 3)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 앞부분에는 김수로왕이 처음으로 서울(京都)을 정할 때, 비록 여뀌 잎(蓼葉, 료엽)처럼 땅이 협소할지라도, 일곱 성인(七聖)이 살기에 적합하고, 마침내 좋은 곳이 될지어다(此地狹小如蓼葉······ 終然允臧歟)라고 하는 이야기를 전한다. 여기에서 좁고 작은 땅을 여뀌 잎(蓼葉)과 닮았다고 비유한 것이다. 이 기록은 13세기부터 이미 우리나라 사람들도 여뀌라는 식물을 깊이 인지(認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것은 한자 蓼(료)에 대응되는 우리말이 존재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그로부터 240여 년 후, 서기 1527년 최초의 한글명칭 엿귀(여뀌)의 기록이 등장한다.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 여뀌를 분명하게 채소로 분류해 두고 있다. 여뀌는 우리 숲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식물자원이었다는 것이다. 민초들의 음식 문화를 기록한 『산가요록(山家要錄)』에서 출현빈도가 높은 야생초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뀌라 한 것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온갖 음식을 만드는 데에 여뀌는 깊이 관여하는 전통식물자원 이었다. 첨단 과학시대지만 고전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 속에서 우리를 재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하천에 서식하는 여뀌풀꽃 모습.  여관구 기자.

<행복한 추억 > 시인 여관구

내가 세월을 따라가다 얻은 것은

거칠어진 손마디와 주름살 뿐 버린 것이 더 많다.

곱고 탱글탱글하던 살결과 젊음은

세월이 내 나이 속에 숨겨놓았고

내 친구들과 공동으로 가꿔놓은 행복한 추억은

인생을 앞질러간 친구가 다 가져갔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아직도 행복한 추억을 가꿔놓을 친구가 있고

가끔은 만나서 추억을 꺼내 만질 수 있어서 좋다.

이제는 백발의 추억들이 만나

또 다른 추억을 만들 수 있어서도 좋고

세월이 나의 추억을 가져간다 해도

그 행복한 추억조차 미련 없이 줄 준비도 되어 있다.

내 젊음도 다 주었는데 추억인들 못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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