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가 우리 생활에 준 행복
'목화'가 우리 생활에 준 행복
  • 여관구 기자
  • 승인 2021.11.1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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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이불솜으로 많이 사용해서 동네마다 솜틀집이 있었을 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식물이다
목화꽃 모습.  여관구 기자.

목화꽃의 꽃말은 ‘어머니의 사랑’이다. 면화(綿花)·초면(草綿)이라고도 하며 열대지방에 원산지가 많으나 섬유작물로서 온대지방에서도 널리 재배하고 있고 보통 한해살이풀이지만 작은 관목형태도 있다. 온대에서는 90cm 내외 열대에서는 2m까지 자라기도 한다. 뿌리는 곧게 뻗으며 줄기가 곧게 자라면서 가지가 갈라진다.

목화의 어린 꽃봉오리가 맺히는 모습.  여관구 기자.

잎은 어긋나고 3∼5개가 손바닥 모양으로 갈라지며 턱잎은 세모꼴의 바소 꼴이다. 꽃은 백색 또는 황색이고 개화 후 점차 분홍색으로 변해간다. 지름은 4cm 내외다. 5개의 꽃잎은 나선상으로 말린다. 꽃받침 밑에 톱니가 있는 3개의 포(苞)가 있고 안쪽에 작은 꽃받침이 있다. 1개의 암술과 약 130여개의 수술이 있다. 열매는 삭과(蒴果)로 달걀 모양이며 끝이 뾰족하고 다 익기 전에 먹어보면 단맛의 물이 베어 나온다. 삭과가 성숙하면 긴 솜털이 달린 종자가 나오는데 털은 모아서 솜을 만들고 종자는 기름을 짠다.

목화꽃이 맺히며 일부는 흰색으로 활짝핀 모습.  여관구 기자.

 

목화꽃이 피었다 지면서 색깔이 분홍색으로 변하는 모습.  여관구 기자.

<목화 꽃의 역사 속으로>

목화의 원산지는 인도로 알려져 있다. 목화는 가장 오래 된 작물로서 역사에 기록되기 훨씬 전부터 이용되었다. 인도에서는 BC 1800년부터 목화를 사용하였으며 BC 1500∼AD 1500년에 걸쳐 목화공업의 중심을 이루었다고 한다. 목화가 인도로부터 유럽에 전래된 것은 회교도에 의해서다. 영어의 ‘cotton’이라는 말도 아랍어의 ‘qtun’또는 ‘ktun’에서 유래되었다. 목화가 중국에 전해진 것은 BC 600년경 인도로부터 불교전파와 함께 승려에 의해 전해졌다고 한다.

목화 열매가 맺힌 모습.  여관구 기자.

한국에서는 고려 말 1363년(공민왕 12) 문익점(文益漸)이 도입하였다. 그는 원(元)나라에 서장관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붓대 속에 목화 종자를 넣어왔다. 그래서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에 살았던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주었고 이를 재배하게 하였다. 이것이 한국에서 목화를 재배하게 된 시초가 된다. 문익점의 손자 ‘문래(文來)’가 목화씨에서 실을 뽑아내는 방적기를 만든 사람이라서 방적기를 ‘물레’라고 하고 실로 천을 짜는 장직기를 개량한 것이 문래의 동생 ‘문영’이라서 솜으로 짠 옷감을 ‘무명’이라고 했다고 한다.

열매가 익어가는 모습.  여관구 기자.

문익점이 가져왔던 목화는 그 종류가 아시아면이다. 이는 숙기가 빠르고 탄력이 강하여 이불솜이나 옷 솜에는 적당하다. 목화는 면사·면직물·혼방직물·그물로서의 용도 이외에 이불솜·옷솜·탈지면 등의 제면용, 면화약·셀룰로이드 등의 공업원료로 이용한다. 종자에서 기름을 짜서 샐러드유·올리브유의 대용품을 만들고 마가린·비누의 원료로도 이용한다. 깻묵은 사료와 비료 목화대는 연료 및 제지원료로 사용한다. 한방에서는 종실을 면실(綿實)이라 하여 종피를 벗긴 종인(種仁)을 강장·지혈·소종(消腫) 등에 처방하고 뿌리는 통경(通經) 등에 약용한다. 예전에는 이불솜으로 많이 사용해서 동네마다 솜틀집이 있었을 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식물이다.

목화 열매가 익어 벌어지는 모습.  여관구 기자.

<목화 꽃의 전설>

옛날에 중국 어느 마을에 ‘모노화’라는 이름을 가진 아리따운 여인이 살았답니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뭇 남성들이 청혼을 했지만 무두 거절했고 돈이 많은 남자도 권력을 가지 남자도 모두 거부했던 그녀는 어느 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상인이 건넨 꽃 한 송이를 받고 결혼을 했습니다. ‘모노화’는 남편과 너무 행복했고 부부 사이에는 예쁜 딸이 태어났는데 그 아이의 이름을 ‘소조챠’라 지었다고 해요. 그러나 그 행복도 오래가지는 못했어요.

목화열매가 모두 익어 벌어진 모습.  여관구 기자.

중국에서 전쟁이 일어나서 전쟁터에 나간 남편이 전사하고 나라도 망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먹을 것도 따뜻하게 지낼 곳도 없는 그녀는 허기로 숨져가는 딸 ‘소조챠’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 살점을 베어 딸에게 먹였답니다. 생 살점을 떼어내어 딸에게 먹였던 모노화는 그렇게 한지 나흘만에 결국 과다출혈로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딸은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장례를 치루고 어느 부잣집에서 딸을 맡기로 하였습니다.

목화열매에서 채취한 솜과 씨앗 모습.  여관구 기자.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무덤에서 새싹이 돋아났고 소조챠는 엄마의 무덤에서 나온 싹을 잘 길러보려고 했지만 때가 가뭄이 심해 물조차도 귀한 때라 상심하고 있었답니다. 그러나 그 식물은 물 한 방울 없어도 꽃이 피어나고 열매가 맺혀 그 열매가 터지면서 그 안에서는 하얗고 부드러운 ‘솜’이 나왔어요. 사람들은 죽어서도 모노화가 딸을 잊지 못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따뜻하게 해 주려고 솜을 보낸 것이라 생각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식물을 사람들이 ‘모노화’의 이름을 따서 처음에는 ‘모화’라 부르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목화’로 불렀다고 한다.

목화열매에서 솜을 채취하고 빈 껍질의 열매 모습.  여관구 기자.

< 식구들의 사랑반찬 > 시인 여관구

어릴 적 내 고봉밥 그릇 속에는

벼꽃보다 보리 꽃이 더 많이 피었었고

가끔은 고구마 꽃도 피었었다.

밥상머리엔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형, 동생들의 반찬이 가득 차려져 있고

웃음꽃이 활짝 피었었는데

지금은 공깃밥 그릇 속에

벼꽃만이 하얗게 피고

밥상머리엔 아내와 나의 반찬뿐이다.

고기반찬이

생선 반찬이 가득해도

그 옛날의 식구들의 웃음반찬만

못한 것은 웬일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