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61)삭풍은 벌판을 거침없이 달려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61)삭풍은 벌판을 거침없이 달려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2.02.1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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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 뚫고 물 길어 저녁 일찍 해 먹고
둘러 앉아 보릿짚 땋아

입춘과 ‘구정’(舊正)은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입춘은 1968년과 1969년 모두 2월 4일이었으나 구정은 각각 1월 30일, 2월 17일이었다. 공식적으로는 ‘구정’이었으나 사람들은 ‘설’로 많이 불렀다. 설 무렵은 매우 추웠다. 추위는 입춘(立春)을 아랑곳하지 않는데다 2월 들어 바람이 많이 불면 체감온도는 한층 내려갔다. 눈 덮인 어래산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은 칼날 같았다. “설을 거꾸로 쇘나, 완전 꼬치(고추) 날이네” “공굴 밑에 문디(문둥이) 다 얼어 죽겠다” 소한 대한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았다. 거지들은 바깥공굴 밑에서 그 겨울을 났다.

아낙들은 대바늘로 뜬 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쉐타’(스웨터, sweater)를 여민 채 종종걸음을 쳤다. 아무리 추워도 물은 길어먹어야 했다. 날이 좀 눅기를 기다린다는 게 해거름이 되곤 했다.

1990년 2월 1일 앞공굴에서 바라본 눈 덮인 양동산. 정재용 기자
1990년 2월 1일 앞공굴에서 바라본 눈 덮인 양동산. 정재용 기자

공동우물은 마을의 남동쪽 모서리에 있었다. 거기서 큰거랑은 논 두 블록 정도 떨어져 있어 큰거랑 물맛 그대로였다. 극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계속되는 강추위에도 얼지 않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낙은 ‘물도’(물독)를 ‘따뱅이’(똬리) 위에 얹고 살금살금 걸었다. 물이 덜 출렁거리도록 물 위에 엎어놓은 박 바가지가 독에 부딪쳐 달그락거렸다. 두 손을 번갈아가며 독을 잡고 한 손은 쉐타의 앞섶에 넣어 녹였다. 이따금 독의 밑동을 훑어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옆으로 흩뿌렸다. 따뱅이 끈을 문 입은 앙다물었으나 얼굴은 칼바람에 그대로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우물터로 가는 앞실댁의 채전에서 새깨댁 앞마당에 이르는 길에는 초가집 두 채 높이 정도의 양버들(populus nigra) 십여 그루가 길 따라 늘어서 있었는데,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나무들이 우우 소리를 내며 부러질 듯 흔들렸다. 그 나무에 둥지를 틀었던 까막까치들이 바람에 휩쓸리며 울부짖었다. 참새들은 처마 속이나 나모댁에서 사촌댁으로 이어지는 뒤울타리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돌개바람이 개구쟁이 소년이 소녀의 치마를 들치듯 헛간의 이엉을 뒤집어놓고 달아났다.

바람은 어래산 꼭대기에서 양동산과 낙산교(落山橋)를 향해 불었다. 낙산교는 형산강을 건너 경주-포항 간을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였다. 6.25전쟁 때 이 다리를 두고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지는 다리에 난 총탄자국으로 알 수 있었다. 바람은 낙산교 남쪽의 복호산(152.8m)과 북쪽의 대미산(130.4m)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바람은 안강 평야를 거침없이 달렸다. ‘내 앞길 가로막는 자 모두 다 물리치리라’ 노래의 한 구절처럼 거칠 것이 없었다. 삭풍(朔風)은 소평마을을 날려 보낼 것 같은 기세였다. 이는 세종 때 여진족들의 침입을 격퇴하고 두만강을 경계로 6진(鎭)을 설치한 김종서(金宗瑞, 1383~1453)의 시조(時調) “삭풍(朔風)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萬里邊城)에 일장검(一長劍)짚고 서서/ 긴 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를 연상시켰다.

이런 날은 모두 저녁 준비를 서둘렀다. 부엌과 쇠죽간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가 제대로 피어오르지도 못하고 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아궁이 불은 하루에 두 번 지폈다. 아침과 저녁이었다. 점심은 아침밥을 커다란 원통형 알루미늄 그릇에 퍼 담아 구들목에 담요로 덮어 두었다가 먹었다. 점심 때 ‘밥통’을 열어보면 김이 식어서 통의 뚜껑과 둘레는 식은땀을 흘린 듯 후줄근했다. 추운 날 저녁은 김치밥국이 제격이었다. 통멸치 넣은 김칫국을 끓이다가 식은 밥을 넣으면 끝이었다,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초저녁에 물을 적셔 놓았던 볏짚과 보릿짚 홰기로 농부는 새끼를 꼬고 나머지는 등잔불 밑에서 보릿짚을 땋았다. 눈을 감고도 꼬고 땋을 수 있어서 불의 밝기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보릿짚은 홰기 다섯 개로 댕기머리 꼬듯 땋았는데 만약 왼쪽부터 시작한다면, 왼손으로 맨 왼쪽 홰기를 잡고 바로 곁에 있는 오른쪽 홰기 밑으로 넣었다가 이어서 그 다음 오른쪽 홰기 위로 올리고, 이번에는 오른손으로 맨 오른쪽 홰기를 잡고 방향만 달리할 뿐 같은 방법으로 땋았다. 이렇게 좌우를 번갈아가며 땋다가 홰기가 다 돼 가면 다른 보릿짚의 꽁무니를 땋다있는 보릿짚의 머리에 꽂아 연결했다.

다 땋으면 ‘틀’에 대고 둥글게 감았다. 열 두 바퀴가 한 묶음이었다. 틀이래야 손을 편 어른의 팔 길이 정도 되는 송판(松板) 양쪽 끝부분에 대가리 없는 대못 한 개씩 박은 게 전부였다. 손이 재빠르면 하룻밤에 한 묶음이 가능했다. 이렇게 땋은 ‘보릿짚’은 다락에 쟁여두었다가 장날에 팔아서 푼돈으로 썼다. 맥고(麥藁)모자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멀리 찬바람이 불어오던 도덕산과 어래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멀리 찬바람이 불어오던 도덕산과 어래산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밤이 이슥해져 배가 ‘헐축하면’(고프면) 남아 있던 죽을 식은 채로 먹었다. 그리고 방이 식을까봐 초저녁부터 깔아놓았던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잤다. 일곱 살짜리 딸애가 제 엄마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엄마, 장에 가면 내 빨간 ‘빼딱구두’(하이힐) 사 온네이(사 오너라)” “그래, 알았다. 있는가 보고, 없으면 나중에 사 줄게”

밤이 되면서 바람은 한층 기승을 부려 헛간 위를 지나는 전깃줄이 울고 툇마루 밑에 있던 백철(白鐵) 개밥그릇이 떽데구르르 마당으로 떨어져 멀리 굴렀다. 안강 지서(支署)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바람결에 일렁거렸다. 당시는 매일 밤11시 30분에 첫 사이렌, 자정에 ‘두불(벌) 사이렌’을 울려 통행금지를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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