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실(齊室) 이야기] 경주(월성) 이씨 익재 이제현공 후손 금남공파의 재실, 남재(南齋)
[재실(齊室) 이야기] 경주(월성) 이씨 익재 이제현공 후손 금남공파의 재실, 남재(南齋)
  • 권오훈 기자
  • 승인 2021.04.15 10:0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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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장가(李庄家)라 칭한 금남(錦南) 이동진(李東珍) 공은 상정/상화/상백/상오의 조부
우현서루를 운영한 계몽운동가 소남(小南) 이일우(李一雨) 공은 상화의 백부
가문에 유명인사 많으나 시인 이상화가 가장 주목받아 문학의 위대함 실감

경주 이씨(慶州 李氏)는 경주를 본관으로 하며 시조는 신라의 건국 신화에 나오는 사로(斯盧) 6촌 중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 촌장으로 전해지는 표암공(瓢巖公)이다. 금남공파의 중시조인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은 고려 충선왕 때 문관으로, 현존하지는 않지만 역옹패설(櫟翁稗說)과 익재난고(益齋亂藁)를 저술한 것으로 전해온다. 익재의 후손인 논복(論福)공이 임란에서 전공을 세워 종2품 가선대부 관직과 복현동 일대를 하사받았다. 논복공의 현손 무실(茂實) 공의 셋째 아들 이찬(爾燦) 공의 현손인 금남(錦南) 동진(東珍) 공이 적수공권으로 사업을 일으켜 큰 부자가 되었다. 재산 일부를 가족, 친지, 종족에 나눠주었는데, 이러한 나눔을 ‘이장’이라 했고 가문명인 ‘이장가’의 유래가 되었다. 금남공파는 논복공파의 세파이고 이장가에 재실과 가족묘를 조성했다.

이장가 재실 전경, 정문인 이장가를 통해 들어가면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본채인 남재(南齋)와 우측에 정자가 있다. 권오훈기자
밖에서 본 재실 전경, 정문인 이장가를 통해 들어가면 본채인 남재(南齋)와 우측에 정자가 있다. 권오훈기자

 

대구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산 9에 위치한 이장가 묘단에는 민족시인 이상화와 그의 4대조 이래 문중의 묘소가 한곳에 모여 있다. 야트막한 야산, 초입인 달서구 명천로 43(대곡동)에는 3년 전에 신축한 ‘이장가 문화관 겸 상화기념관’이 있다. 재실은 바로 뒤에 있는데 1939년에 상화의 맏종형인 긍남(肯南) 이상악(李相岳) 선생이 제각(祭閣)과 함께 건축했다. 원래 본리리에 있던 것을 2002년 ‘대곡역 그린빌’ 아파트 건설로 인해 지금의 자리로 대지면적을 축소하여 별채는 멸실하고 본채만 옮겼다. 정문인 이장가(李庄家)를 들어서면 재실은 전면 5칸 팔작지붕 건물로 방이 양쪽으로 세 개나 된다. 남재(南齋)는 문중의 대부분이 남녘 남(南)자를 호에 넣어 사용한 데서 유래한다. 상화의 형 상정(相定)은 청남(淸南)이고 막내아우 상오의 호는 모남(募南)이다. 상화(相和)는 백아(白啞)이다.

본채 건물인 남재(南齋)의 모습. 권오훈기자
본채 건물인 남재(南齋)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팔작지붕으로 방이 세개에 대청이 넓다 . 권오훈기자

 

재실에서 우람한 소나무 숲길로 70m 정도 들어가면 독특한 건물 양식의 제각(祭閣)이 나오고 그 뒤 경사지에 묘단(墓壇)이 조성되어 있다. 제각은 일제강점기 프랑스인이 설계하고 중국(만주)에서 적벽돌을 들여와 우리 기술자와 일본인 기술자가 함께 건축하여 4개국의 기술이 녹아있다. 이 제각을 6.25전쟁 중 인민군 대대가 막사로 활용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 철문을 달았다. 우리가 칠곡 다부동이 인민군 저지선으로 알고 있지만 우회하여 남쪽인 화원 일대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화원 동산에는 이곳에 주둔한 인민군을 저지하러 내려온 보병 8사단 10연대가 임무를 완수하고 공비토벌을 위해 전라도로 이동할 때 지역 유지들이 뜻을 모아 무운을 기원한 ‘육군보병 제8325부대필승기원’비가 있다. 또한, 중구 서성로에 있는 소남 고택은 6.25 당시 국군 지휘본부로 사용되었다니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약간 서구식 건물 형태를 띤 재각(齋閣) 앞에서 이재원 님이 설명하고 있다. 권오훈기자
서구식 건물 형태를 띤 재각(齋閣) 앞에서 이재원 씨가 설명하고 있다. 권오훈기자

 

제각에서 제사를 모실 때는 뒷문을 여는데, 이는 뒤쪽에 봉안된 진신사리로 부처님을 대신했던 적멸보궁과 같은 구조다. 내부 벽면 상단에는 소남 이일우 선생과 청남 이시우 선생을 비롯하여 사촌 5형제와 상화 4형제의 영정사진이 걸려있다.

재각 내부의 모습, 정면 재단 뒤로 달려있는 문을 열고 재를 모신다. 벽면 상단에는 영정 사진이 걸려있다. 권오훈기자
재각 내부의 모습, 정면 재단 뒤로 달려있는 문을 열고 재를 모신다. 벽면 상단에는 영정 사진이 걸려있다. 권오훈기자

 

특기할만한 것은 ‘묘지약력’비의 뒷면에 새겨진 ‘절목’(節目: 법률이나 규정 따위 낱낱의 조목)이다. 금남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제각과 함께 조성되었다. 허례허식 없이 제사를 지내라는 내용인데 당시뿐 아니라 요즘으로서도 파격적이다. 군사혁명 후 이 집안 사위였던 박창암 장군이 이 내용을 ‘건전 가정의례준칙’ 제정에 참고토록 했다고 한다.

재각 건물 우편에 '묘지약력'을 새긴 조그만 비가 있는데 뒷면에는 제사와 종중재산 관리에 대한 세세한 규정, 절목(節目)이 있다. 권오훈기자
재각 건물 우편에 '묘지약력'을 새긴 조그만 비가 있는데 뒷면에는 제사와 종중재산 관리에 대한 세세한 규정, 절목(節目)이 있다. 권오훈기자

 

‘절목’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제폐지(忌祭廢止) 기제사는 폐지한다.

묘사춘추양절(墓祀春秋兩節) 묘사는 봄가을 두 차례만 지낸다.

제의여기동식(祭儀與忌同式) 제사는 기제사와 같은 방식으로 한다.

제기죽기(祭器竹器) 제기는 대나무 제품을 사용한다.

제수현주조율시과삼품어육양포(祭需玄酒棗栗時果三品魚肉兩脯) 제수는 밤, 대추, 계절과일 세 가지에 어포와 육포 두 가지만으로 하라

향사비, 묘지 수호비, 토지관리비 등에 비용을 쓰고 남으면 종중재산으로 하고 자손들이 사사로이 나눠 쓰지 마라. 단 종손이 넉넉하지 못하면 뜻을 모아 종사를 보존하도록 하라.

종중재산은 종손이 관리하되 능력이 없어 맡길 수 없을 때에는 능력있는 자를 선정하여 관리토록 하되 다음 종손에게 확실히 전하게 하라.

묘단은 좌측의 직계 종손 묘역과 우측의 방계손 묘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금남공 이동진공의 조부인 갑신(甲新) 공과 부 증열(曾悅) 공의 묘소를 이장하여 모신 아래로 직계손이 좌측에서부터 순서대로 봉안되었다. 제각은 직계 종손 묘지 방향으로 향해 있다. 우측의 방계묘역에 우남 이시우 공부터 상화 4형제 등 혈족의 묘소가 있다. 이상정 장군은 독립유공자로 정부 보조를 일부 받아 비석을 건립했다. 저항 시인인 이상화는 몰(歿)해에 백기만 등의 우인들이 아담한 비석을 세웠는데 호 백아의 벙어리 아(啞)자가 너무 자학적이라며 입 구(口) 획을 떼어버렸다. 2003년에 죽순문학회가 커다란 비석을 추가로 세웠다. IOC 위원이었던 이상백과 수렵협회장이자 저술가인 이상오의 비석도 크게 세워져 있다.

이상화 시인의 묘소, 장례 당시 백기만 등 우인들이 세운 단아한 비석이 있는데 2003년 죽순문학회에서 큰 비석을 세웠다. 옆쪽에는 형 이상정 장군의 비석. 권오훈기자
이상화 시인의 묘소, 장례 당시 백기만 등 우인들이 세운 단아한 비석이 있는데, 2003년 죽순문학회에서 큰 비석을 또 세웠다. 옆쪽은 형 이상정 장군의 비석이다. 권오훈기자

 

상화기념관 겸 이장가문화관은 현 종손인 이원호 관장(익재공 26세손)이 관리하며 재실과 재각, 묘원은 이 관장의 당숙인 이재원(65) 선생이 관리하고 있다. 기념관은 달서구에서 추진하는 상화로 문화거리 추진사업의 지원을 받는 ‘상화로 도시재생 문화기행 주민협의체’와 함께 각종 문화 이벤트를 기획하여 진행하고 있다. 1, 2층에 걸친 전시실에는 이장가 사람들과 이상화 시인의 행적, 유품 등을 전시하여 관람객들에게 위국충절, 민중계몽, 근검절약, 효도우애 등의 덕목을 되새길 수 있는 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이상화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24효도병풍, 상화는 질녀 결혼선물로 손수 주석을 달아 선물했다고 한다. 권오훈기자
이상화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24효도병풍, 상화는 질녀 결혼선물로 손수 주석을 달아 선물했다고 한다. 권오훈기자

 

이장가 문중에는 근세사에 한 획을 그은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특별히 관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이상화밖에 알지 못한다. 교과서에 실렸던 그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 “나의 침실로”를 읽으며 학창시절을 보낸 덕이다. 문학의 힘이 대단함을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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