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숙정문((肅靖門)의 유래와 유감
65 숙정문((肅靖門)의 유래와 유감
  • 조신호 기자
  • 승인 2020.08.0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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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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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서둘러 한양으로 천도하여 도성 건설을 계속했다. 한양은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남쪽에 한강을 끼고 있어서, 수로 교통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주변이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천혜의 요새지라는 지리적 이점과 함께 삼국문화가 골고루 스며들어 지방색이 가장 적다는 점, 그리고 풍수지리적 명당임을 바탕으로 최종 천도지로 결정되었다. 풍수지리 사상이 한양 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통설이다.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이 설치되고, 정도전이 궁궐과 종묘, 사직을 배치했다. 한양을 방위하기 위한 성곽을 쌓으며 4대문과 4소문을 배치했다. 결정된 4대문은 동쪽의 흥인지문, 서쪽의 돈의문, 남쪽의 숭례문, 북쪽의 숙정문이고, 4소문은 동북의 홍화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 서남의 소덕문이었다.

삼봉의 한양 건설 설계도는 주례(周禮)의 동관고공기(冬官考工記)에 나오는 국도조영(國都造營)의 원리에 따라 자연 환경에 순응하는 것이었다. 북악을 주산으로 삼아 바로 밑 중앙에 정궁을 세우고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라 궁궐 좌편에 왕실의 조상신을 모시는 종묘(宗廟), 우편에 토지와 곡식을 주관하는 신의 받드는 사직단(社稷壇)을 배치하여 세웠다. 지금의 태평로에 해당하는 광화문 남쪽 육조거리는 길이가 600m, 폭이 60m, 좌우로 도평의사사(의정부)와 6조(이, 호, 병, 예, 형, 공), 의흥삼군부와 사헌부등 중앙관청을 배치하였다.

남쪽에 동서의 대로(동대문과 서대문을 연결하는 종로)를 닦아 상가가 들어서는 시가지를 만들었다. 이렇게 종로, 운종가(雲從街)를 중심으로 북쪽에는 북촌이라 하여 관청과 상류층 주택이 형성되었고 남쪽의 남촌에는 상인이나 하류층의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사대문을 정했다.

정도전은 인의예지신 오행에 따라 동쪽에 흥인문(興仁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북쪽에 ‘지혜를 크게 하는’ 홍지문(弘智門), 그리고 중앙에 보신각(普信閣)을 계획했다. 유교에서 북쪽의 지(智)는 시비지심(是非之心), 즉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선악을 구별할 줄 아는 슬기로운 마음이다. 그러나 그 당시 권력을 가진 사대부들은 백성들이 옳고그름을 가리는 시비지심으로 똑똑해지면 정치하게 어렵다고 생각하여 북쪽 홍지문을 반대했다. 결국 1396년(태조 5년) 홍지문 대신에 ‘개혁(改革)과 정화(淨化)’라는 의미를 지닌 숙청문(肅淸門)을 북쪽에 세웠다. 그러나 그 문을 열어놓으면 여성들의 음기(淫氣)가 강해진다고 하여 평소에 닫아 두었다. 산속에 있는 숙청문을 드나들며 남녀가 숲속에서 풍기문란하게 노는 게 좋지 않다는 점과 임금의 궁궐 윗쪽 산에 있어서 보안상 출입을 봉쇄할 필요성도 작용했을 것이다.

100여 년이 지난 1504년(연산군 10년) 숙청문을 폐쇄하고, 원위치에서 약간 동쪽인 지금의 자리, 지금의 삼청터널 위쪽으로 옮겨 숙정문(肅靖門)을 만들었다. 숙청(肅淸)보다 다소 어감이 부드럽지만 숙정(肅靖)도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음’ 이라는 뜻이었다. 이 문은 약 200년 후 다시 옮겨졌다. 1715년(숙종 4년) 지금의 세검정 길가 홍제천 위(상명대학교 앞쪽)에 세운 수문인 한북문(漢北門), 즉 탕춘대성(蕩春臺城)의 성문을 숙종이 친필로 써서 홍지문(弘智門)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320여년 전 정도전이 구상했던 홍지문의 수난이 매듭지는 역사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 홍지문의 수난이 계속되어 일제 강점기 홍수로 유실되었다. 오늘날 세검정 근처에 있는 것은 1977년 복원할 때 고증이 부족하여 인왕산 쪽이 절단된 채 복원된 건물이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어찌하여 숙정문 근처까지 가서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을까? 1396년(태조 5년) 개혁과 정화라는 의미로 세운 숙청문(肅淸門), 그 문을 열어놓으면 여성들의 음기(淫氣)가 강해진다고 폐쇄했다가, 1504년에 개칭한 숙정문(肅靖門), 그곳에 왜 갔을까? 그리고 그의 죽음은 오늘날의 권력에 의해 미궁에 묻히고 있다. 조선 건국 당시처럼 백성들이 옳고 그름을 가리는 시비지심으로 똑똑해지면 정치하게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개혁과 정화’로 세상을 밝게하는 정신에 역류하며 현상일까? 오늘날의 한성 판윤, 서울시장이 숙정문 부근에서 죽었으니, 묘한 일이다. 음기가 강하다고 패쇄했던 그 문이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