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보훈의달] 이 시대에도 이순신이 필요하다
[호국보훈의달] 이 시대에도 이순신이 필요하다
  • 조신호 기자
  • 승인 2020.06.2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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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픽사베이
충무공 이순신. 픽사베이

 

2014년 7월 개봉된 영화 '명량'이 관객 수 1천7백만여 명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그 폭발적인 관심은 바로 이 시대에도 이순신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를 염원한다는 갈망이었다. 임진왜란(1592-1598) 1년 전, 전라좌수사에 임명된 이순신은 1년 동안 철저하게 전쟁에 대비했다. 그 마지막 단계는 전쟁 발발 하루 전, 1592년 4월 12일에 새로 만든 거북선의 지자포(地字砲), 현자포(玄字砲) 발사 시험을 완료한 것이었다.

1592년 5월 7일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1596년 말까지 약 4년 8개월 동안, 이순신은 연전연승으로 왜적을 물리쳤다. 그러나 일본의 재침과 함께 투입된 이중간첩 요시라의 반간계(反間計)에 선조와 조정 대신들이 속아 넘어가서, 정유년(1597) 2월 26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한산도에서 체포하여 구금, 문초했다. 임금을 기망(欺罔)한 죄목은 죽음이었으니, 그에게 생애 최악의 치욕적 비극이었다. 약포 정탁(鄭琢)의 상소로 이순신은 4월 1일 백의종군 형벌로 석방되었다.

흰옷 입은 죄인이 되어 아산 본가에 도착한 이순신에게 4월 13일 어머니의 부음이 전해 졌다. 그러나 금오랑(金吾郞)의 독촉으로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남쪽으로 떠나야 했다. 죄인이 된 치욕과 어머니에 대한 불효의 슬픔이 컸다. “다만 어서 죽기만 기다릴 뿐이다."(只待速死而己), 또는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不如早死也)라고 비통함을 일기에 연이어 썼다.

7월 15일 원균의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대패하면서 전황이 급변되었다. 8월 3일, 재임명된 이순신은 함선도 병력도 병장기(兵仗器)도 없는 빈 손의 통제사였다. 그는 바로 남도지역으로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삶을 살피며, 군사와 무기, 군량을 확보하며 하동에서 출발하여 구례, 곡성, 순천을 거쳐 보성에 도착한 8월15일 선조의 명령이 도착했다. ‘수군이 미약하니 육군에 합류하라!’

이순신은 '금신전선상유십이'(今臣戰船尙有十二)로 시작되는 장계를 올렸다. “아직도 신에게 전선이 12척 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 싸우면 오히려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일 수군을 전패한다는 것은 바로 적이 만 번 다행으로 여기는 것이며, 충청도를 거쳐 한강까지 갈 것입니다.”

이는 명백한 항명이었다. 지난 2월처럼 다시 체포될 수도 있었으나, 그에게 오로지 나라를 구하려는 충정뿐이었다.

8월 20일 장흥 회령포에 가서 배설이 칠천량에서 후퇴하며 숨겨놓은 판옥선 12척을 인수하여 배에 올랐으나, 적들이 대거 몰려온다는 보고가 급박하게 달려왔다. 회령포에서 이진(梨津)으로 어란포로, 다시 진도 벽파진으로 후퇴를 거듭하다가 결국 우수영 앞바다까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명량해전 하루 전날인 1597년 9월 15일, 이순신은 휘하 장수들을 모아 놓고, “죽으려 하면 곧 살고, 살려고 하면 곧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라고 당부했다. 단 13척으로 왜적 133척과 마주한 치열한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순신은 그날 일기에 ‘천행(天幸)’, 즉 ‘하늘이 내린 행운’ 이라고 했다.

이순신은 ①생애 최악의 치욕과 슬픔으로 백의종군하며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 되었을 때, ②조선 수군이 괴멸되어 빈 손이었을 때, ③남해 재해권을 확보한 왜적이 최강의 전력으로 밀려왔을 때, ④선조가 수군을 패하고 육군과 합류하라 명했을 때, ⑤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거듭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을 때,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죽음을 무릅쓰고 울돌목에 나아가 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살렸다.

명량대첩은 이순신의 우국충정이 이루어 낸 금자탑이었다. 그렇게 살려낸 대한민국에 우리 모두가 살고 있다. 1597년 9월 16일, 울돌목의 승리가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말, 우리 역사와 문화, 그리고 오늘날의 케이팝까지 모든 것이 400여 년 전에 모두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1931년, 암울한 일제 치하에서 환산(桓山) 이윤재(李允宰)가 판금을 당해가며 '聖雄 李舜臣'(성웅 이순신)을 출간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