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을 맞으며] 새내기 할매할배의 시련
[가정의 달을 맞으며] 새내기 할매할배의 시련
  • 장기성 기자
  • 승인 2020.04.29 17:30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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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유진(오른쪽)의 돌잔치 날  모습이다. 그 녀석은 돌잡이를 할 때 ‘흰 실타래’를 먼저 잡았다. 장기성 기자
손자 유진(오른쪽)의 돌잔치 날  모습이다. 그 녀석은 돌잡이를 할 때 ‘흰 실타래’를 먼저 잡았다. 장기성 기자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라는 말과 ‘손주는 처음 만날 때도 기쁘지만, 헤어질 때가 더 기쁘다’는 말이 상충됨을 깨닫는 데 채 한 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외국에서 살고 있는 딸 가족이 5년 만에 잠시 한 주간 일정으로 귀국한단다. 그동안 이역만리 타국에서 두 아이를 낳아 길렀으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음이 짐작되고도 남는다. 요즈음은 아이 하나 낳아 키우는 것도 버거운 세상인데 둘이라니, 외국 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더니 인구절감시대에 진짜 애국자가 되어 귀국하는 셈이 됐다.  

귀국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아내는 바빠졌다. 딸이 좋아하는 게며, 갈치, 멸치조림, 조기, 고등어를 비롯한 생선은 물론이고, 갖은 모둠전 준비로 한껏 들떴다. 명절 차례상을 능가하는 매뉴얼이 곳곳에 작동한다. 손주들이 좋아할 음식이며 장난감 대여까지 손을 뻗친 것을 보니 여간 예사롭지 않다. 

이런 와중에 그동안 소홀히 했을, 딸 가족의 건강 체크를 위해서 대학병원에 건강검진 예약도 잊지 않는다. 명절이나 기제사 때 맏며느리로서 과도한 제수(祭需) 준비 부담에 늘 궁시렁거리며 늘어놓던 불평도 이번에는 아예 흔적조차 없다. 손주사랑이 조상(祖上)숭배를 능가하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게 됐다. 놀라운 일이다. 누가 그랬던가.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라고 하는 말이 있지 않던가. 지금 이 순간에 ‘내리사랑’이란 말이 헛말이 아님을 실감나게 하는 순간이다. 손주들을 직접 본다는 기쁨이 이 모든 설렘의 근원이 아니겠는가. 

귀국 하루 전날이다. 아침부터 집안이 분주하다. 대청소가 시작된 것이다. 평소에 하지 않던 베란다 청소며, 침대 이동, 화장실 청소, 화분(花盆)에까지 손을 대는 걸 보니 더더욱 예사롭지가 않다. 계 모임에서 가끔씩 들르던 고급 한정식 식당을 날짜별로 요일별로 꼼꼼히 메모한다. 그동안 태평양에 가로막혀 카톡으로 대화를 주고받던 손주들을 직접 볼 수 있게 된 것이 이토록 마음을 들뜨게 만들었음이리라. 
 

 

손녀 제니의 학예발표회 때 모습이다. 장기성 기자
손녀 제니의 학예발표회 때 모습이다. 장기성 기자

 

하루가 여삼추라더니 아침부터 손주 기다림에 지쳐가던 순간, 드디어 초인종이 정적을 깬다. 손주들이 막 아파트 1층 경비실 입구에 도착한 것이다. 모든 시선은 온통 현관문을 향해 있다. 엘리베이터의 삐꺽거림이 유난히 크게 들린다. 그 순간 손주들이 엄마의 등과 손에 이끌려 집 안으로 물밀듯 밀려 들어온다. 낮선 공간 앞에 멈칫한 아이들은 연신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엄마의 손을 놓칠세라 부여잡고 놓지 않는다. 얌전한 손주로 키워졌음이 몸으로 느껴진다.  

누굴 닮았는지 살펴볼 겨를도 없이, 아내는 손주들을 끌어안고 눈물부터 쏟아낸다. 손주들도 엉겁결에 영문도 모른 채 따라 울고 만다. 잘 커준 손주들에 대한 대견함과 그동안 잘 키운 딸에 대한 애잔함이 눈물로 표현된 것이 아니겠는가? 이때까지만 해도 얌전한 손주요 침착한 할미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도착 첫날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미국과의 시차가 일상 리듬을 잃게 만든 것일까? 새벽까지 거실은 놀이공원 놀이터를 방불케 한다. 금방이라도 아래층에서 ‘좀 조용합시다!’라며 누군가 올라올까봐 좌불안석이다. 이제껏 아내는 취침에 방해가 되는 일에는 그 어떤 대가나 보상으로도 관용은 없다며 열변을 토하던 모습이, 이번엔 꿀 먹은 벙어리다. 침묵하는 것이 오히려 심상치 않다. 원래 활화산보다는 휴화산이 더 무섭다고 하지 않던가. 

다음날부터 온 집안은 장난감과 잡동사니로 넘쳐난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둘은 잠시도 동작을 멈추지 않는다. 텔레비전 버튼이며, 냉방기 버튼, 벽에 걸린 뻐꾸기시계며, 누르는 기능을 가진 가전제품들은 대부분 전사(戰死)하여 짧은 생을 마감했으나 장례식을 치를 촌음의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아침에 직장으로 출근을 했으나 지난 밤 불면(不眠)으로 인한 현기증과 어지러움으로 몸을 가눌 힘조차 없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우리 집 일상은 첫날과 다르지 않다. 붙박이로 우리 부부가 즐겨보던 TV 뉴스며, 연속극, 다큐멘터리 시리즈의 시청권도 둘에게 빼앗긴지 오래다. 그 자리에는 ‘뽀로로 시리즈’가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시리즈 속의 캐릭터인 크롱, 포비, 에디, 루피, 패티, 해리 등은 할미 할비가 외울 정도로 친숙해졌다. 억지춘향 신세가 따로 없다. 

심지어 놀이공원에서도, 백화점에서도, 레스토랑에서도 온전히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둘의 행동은 럭비공과 같다. 어디로 어떻게 튈지 모르는 것이 문제였다. 딸이 넋두리처럼 한 말이 뇌리를 스친다. ‘미치지 않고는 하루도 살 수 없다고.’ 깊이 공감되고도 남을 말이다. 

짧고도 긴 체류가 끝나가고 있었다. 작별하던 날, 손주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아내는 손주들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의 의미를 그저 할배 혼자 내심 짐작해 본다. ‘손주는 처음 만날 때도 기쁘지만, 헤어질 때가 더 기쁘다’는 말, 말이다.   

그래도 그놈들은 여전히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할미·할배의 들뜸과 설렘의 대상이자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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