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볕 가득한 모교 역사관에서 경북여고 20대 총동창회장 김정숙(68·44회) 동문을 만났다. 지난 4월 모교 강당에서 97회 총동창회를 개최하며 들었던 축사의 메시지가 인상 깊었다. 의례적이기보다는 강건하며 군더더기 없는, 그러나 조용한 힘이 느껴졌다. 몇몇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무대 뒤에서 시간과 돌발 상황을 체크하고 조율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 성장기의 꿈은 의사
“저는 경산에서 태어났어요. 너덧 살 정도였는데 명절날 외갓집에 갔어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두 분 다 일본서 의과대학을 나온 의사였습니다. 화롯불 옆에 간식거리가 있었어요. 세배를 받고 나면 외할머니가 질문을 해요. 정답을 맞히면 맛있는 간식을 주시니까, 어떡하든 답을 구하려고 궁리하지요. 손자 중에 저만 단박에 답을 맞히곤 하니까 절 무척 귀여워하셨어요. 넌 여자라도 나중에 커서 전문직이 되어라 그러시는 거예요. 전문직이 뭔지도 모르면서도 그게 마음 밑바닥에 남았나 봐요.”
“제가 어릴 때 아버지가 사업을 크게 하셨어요, 전 몸이 약해서 밖에 나가 노는 일보다는 피아노 치는 것과 책 읽는 걸 좋아했어요. 말수도 적었고요. 아침이면 집에 신문이 몇 종류나 들어와요. 그걸 아버지께 배달하며 저도 열심히 읽었지요. 국민학교 4학년인가 조선일보에, 암에 대한 기사가 오랫동안 실렸어요. ‘암은 세포가 미친 것이다, 미치광이 세포다’라는 말이 머릿속에 딱 들어왔어요. 그 후로도 암에 대한 기사들을 스크랩하면서 나도 모르게 ‘의사가 돼서 이걸 공부해 보자’고 생각했어요.”
◆ 뜻하지 않은 선택, 그 선택이 데려다준 길
“고2 때 아버지 사업이 크게 기울었어요. 의대는 6년을 공부해야 하는 데다 학비는 없고. 그래서 경북대 사대 가정과를 갔어요. 당시에는 인기 학과였거든요. 발령을 받고 형편이 나아지면 다시 의대에 갈 생각이었지요. 하지만 안 되겠더라고요. 아직 집안 형편은 엉망인 데다 동생들도 있고 하니 어쩔 수 없었어요. 그래 안 되겠다. 나중에 대학원에 가자. 그때 식이요법 쪽으로 공부하자고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졸업 후 2월 말 지방으로 발령이 났어요. 초임지에 부임하는 날, 택시를 타고 운동장에서 내리니까 아이들이 창문에 매달려 휘파람을 불고 난리가 났어요. 중고등학교가 같이 있었는데 애들 중에는 취직해서 돈 벌다 다시 고등학교 오는 애들도 있었거든요. 나하고 나이가 같은 애도 있었어요. 복도를 지나가면 ‘긴 머리 소녀’ 노래를 부르고. 며칠 후 교장실에 불려 갔더니 교장선생님이 물어요. 머리카락을 길게 해야 할 이유가 있냐고. 지금 당장 시장통 미장원에 가서 아줌마처럼 파마하고 오라고 했어요. 적당히 말고 최대한 빠글빠글하게 아줌마처럼. 펑펑 울면서 바로 가서 파마했지요.”
◆ 아이들과 함께 희로애락을
“시골 학교에서는 한 사람이 네다섯 개 과목을 맡기도 해요. 의성에 발령받았던 때는 영어도 가르쳤는데 학력평가에서 관내 19개 학교 중에서 우리 학교가 1등을 했어요. 영어평균점이 36점인데 우리학교는 76점이 나왔어요. 만점자도 나오고. 40년 전, 중학교 1학년 영어 수업을 들어가면 책을 펴고 읽는 수업을 안 했어요. 처음부터 그냥 간단하게 영어로 말하고 듣는 수업을 했지요. 차츰 귀가 열리니까 영어는 원래 그렇게 하는 줄 알고 잘 따라 했어요. 영어 노래를 신나게 막 발을 구르면서 부르니까 그냥 회화가 저절로 되는 거지요. 정말 보람이 있었어요. 음악도 가르치고. 아이들이 엉뚱한 짓을 하는데도 나는 그게 다 재밌는 거예요.”
“타지로 전근 간 어느 해였어요. 수업이 시작되면 남학생들은 창문을 타고 나가 버리고, 여학생들은 수업 시간에도 화장하고 선생 말은 귓전으로도 안 들어요. 몇 달이 지나도 마찬가지예요. 5월 ‘스승의 날’인데도 꽃 한 송이, 인사 한마디가 없었어요. 나는 여태까지 내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내가 교사로서 자격 미달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정말 그만둘 때가 됐구나 싶었지요. 저녁때가 돼서 교문을 나서는데 “샘요, 삐졌어요?” 하면서 몇 녀석이 불쑥 나타나서 꽃다발을 내밀어요. 그 속에 전교생들이 편지 한 장씩을 다 써서 끼워 놨어요. 그 편지 속에는, 사회의 끝을 보는 것 같은 쓰라린 진솔한 사연들이 있었어요. 마음이 뜨거워졌어요. 그즈음에 전 정말 사표를 낼 생각이었거든요. 애들을 감당할 수 없는데 어떻게 교육하겠어요. 내가 공부시키고 1등을 만들고 하는 건 하겠는데 그것하고는 전혀 차원이 다른 문제잖아요. 거기서 저는 사표 대신 실업계 아이들을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 글로벌 인재 양성의 단초 마련
“제가 승진이 빨랐어요. 교장으로 오지 학교들에 다니며 많은 걸 보고 느꼈습니다. 우리 시대의 사회상이 그대로 드러나요. 부모가 돈 벌러 나가면서 가정이 깨지고 조손가정에서 불우하게 자라는 애들이 너무 많았어요. 특히 지방의 공고, 농고, 종고로 가면요. 그즈음 교육연수원 강의를 나가게 되었지요. 그런데 강의평가에서 내리 3년을 1등을 한 거예요. 당시 제가 경북 중등교육계 여성박사 1호였거든요. 도교육청에서 장학사로 적임자라며 데려가려 하는데 난 정말 애들 곁을 떠나기 싫었어요. 제가 현장에서 보고 겪은 일들이, 경북도교육청 ‘과학직업장학사’를 하면서 ‘해외글로벌직업전문교육’을 기획하게 된 계기였지요.
“도교육청에 들어가 보니 40대 초반의 여자는 나뿐이고 다 스승 같은 분이셨지요. 직책은 ‘과학교육직업과장’이라는 행정직 전문가(장학사)였습니다. 일주일 내내 사무실에서 먹고 자고 사람 만나고 또 일하고. 기업을 설득하고 예산을 확보해서 실업계 고등학교에서 선발된 아이들을 해외로 연수를 보냈어요. 아이들은 현지에서 기술을 익히고 월급까지 받아 모아서 돌아옵니다. 이런 글로벌 인재들은 기업에서 서로 데려가려 하지요. 처음 기획할 때는 의구심을 갖던 분들도 현장실습을 통해 아이들이 글로벌 인재로 바뀌는 걸 보고는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 줬습니다. 다들 미래를 예측하고 세상을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지요. 이를 계기로 실업계 졸업생들의 위상이 달라졌어요. 그 후 저는 ‘독립투사’,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구미 교육장을 지내고 교육계에서 선출직을 빼고는 두루 다 경험하고 퇴직했습니다. 힘들 때도 있었지만, 가보지 않은 길을 믿고 열어주신 선배와 열정적인 동료들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 시니어에게도 책무가 있다
“우리는 어려운 시절을 살아왔지만, 희망을 보고 살아왔잖아요. 경제를 일으키고 번듯한 나라를 만들고. 나이 들었다고 그냥 주는 것 받아 가고, 자존심과 자부심 다 내려놓고 젊은 세대야 어찌 되던 나 몰라라. 이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시니어들이 가진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무덤으로 갖고 가는 게 아니라 젊은 세대를 위해 내놓는 큰 변화, ‘시니어 르네상스’를 한번 일으켜 보면 어떨까요? 인구의 1/5에 육박하는 시니어들이 다시 한번 롤모델이 되어 경험과 재능으로 사회를 되비춰 주는 건 어떨까, 합니다.”
이동하느라 앉은 차 뒷좌석에는 두꺼운 성경책 두 권이 포개져 있었다. 가죽 양장본 가장자리는, 몇십 년 된 듯싶은 손자국의 흔적으로 닳고 닳아서 허옇게 벗겨져 있었다. 바탕색이 가늠되지 않을 만큼. 그게 바로 김정숙 회장의 인생을 열어가는 ‘열쇠’였으리라. 그녀는 ‘철의 여인’이 아니라 ‘강철 나비’였다. 무한정의 에너지로 비상을 멈출 줄 모르는 ‘강철 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