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자신에게 가능可能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혜안의 과정이다. 가능이란, 자신에게 잠재된 것을 발견하고, 발굴하고 그것을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하여 이루려는 과정이다. 가능하지 않은 것, 불가능한 것은, 자신하고 상관이 없어, 아무리 노력해도, 성취할 수 없는 신기루와 같은 것이다. 가능하다고 해도, 사회에서 모두 허용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가능한 일이,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의 진보에 일조하는 의미意味가 있는 일이어야 한다.
‘가능’이란 단어는 아련하지만, 나의 노력과 몰입을 요구할 만큼, 매력이 있다. 어떤 것이 나에게 가능하다는 사실은, 현재 내가 그것을 소유하지 않고 있다는 자각과 그것을 인정하는 겸손이 숨어있다. 가능은 그것을 시도하는 사람에겐 자기 처지, 특히 자신의 부족함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혜안이다. 가능은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희망으로 현재의 자신을 변화시키겠다는 의지다. 가능은 현재의 모습에 안주하는 게으름이 아니라, 미래의 모습을 애써 만들려는 근면이다. 가능은 무엇보다도, 짧은 인생을 사는 인간에게, 그 덧이 없는 삶에 의미意味와 아름다움을 선물한다. 인간은 가능한 것을 알아차려 노력하는 한, 인간이다. 그것을 성취하느냐, 하지 못하냐가 아니라, 그것을 완수하려는 숭고한 노력으로 인간을 동물의 상태에서 탈출시켜 신적인 경지로 끌어 올린다.
의미意味는 인간에게 순교殉敎도 요구할 수 있는 자기 삶에 대한 문법이자 목표다. 순교란 자신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의 태도다. 심리학자 빅터 플랭클Viktor E. Frankl이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이란 책에서 말한 ‘살아야 하는 이유’다. 그는 나치스 홀로코스트 생존자로 니체의 말을 마음에 담아 생존의 비밀로 삼았다. “살아야하는 이유why를 가진 사람은 인생에 일어나는 어떤 일도how견딜 수 있다”고 말한다. 아우슈비츠 생존자는 건강한 사람, 돈 많은 사람, 명예로운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분명히 아는 사람이다. 누군가 나에게 “당신이 매일매일 생존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내가 오늘 사는 이유는 이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그는 무엇이든 극복할 힘이 생긴다. 프랭클은 여느 인간들이 굴복할 수밖에 없는 인생의 고통과 그것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How’(독일어 바룸Warum)라고 표현했다. 기원전 586년 바빌로니아 제국이 예루살렘을 파괴했을 때, 유대인들이 신에게 부르짖은 단어는 ‘에이카’eyka, 즉 ‘어떻게 이런 일이!’라는 감탄사다. 기원전 586년 바빌론제국이 예루살렘을 파괴했을 때, 유대인들이 표현한 망연자실 단어가 ‘에이카’였다. 구약성서 <애가서>의 히브리어 이름이 ‘에이카’다.
자신이 살만한 이유를 가질 때 부수적으로 일어나는 일, 그것이 행복이다. ‘행복’happiness라는 영어단어는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일에 몰입할 때 나에게 생기는 일, 즉 ‘해프닝’happening이다. 같은 어원에서 온 두 단어다. 그런 사람만이 아름답다. 그(녀)는 한 손이 꽃처럼, 한 그루 나무처럼, 한 마리 새처럼 언제나 자신에게 몰입되어 있다. 소나무가 옆에 있는 소나무가 자신보다 잘생겼다고, 자신보다 크다고 불평하거나 시기하지 않는다. 소나무에 ‘너는 누구냐?’라고 묻는다면, 소나무는 거침없이 말할 것이다. ‘나는 나다’.
노예로 살다가 자기 삶의 의미를 찾아, 그것을 깨닫고 철학자가 된 사람이 있다. 그는 자기 삶의 어려움을 통해, 인생의 핵심을 간파하였다. 로마시대 세네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대표적인 후기 스토아 철학자인 에픽테토스Epitetus(기원후 55~135)다. 그는 프리지아의 히에라폴리스(오늘날 터키 피묵칼레)에서 노예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 에피테투스는 ‘돈을 주고 산’이란 이름으로 노예 신분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그곳에서 주인이 그의 다리를 부러뜨려 일생 절름발이로 살았다. 그는 후에 네로황제의 서기관인 에파프로디토스의 노예로 로마에 거주했다. 에파프로디토스는 그의 철학 공부에 대한 열정에 감동하여 당시 최고의 철학자 무소니우스 루푸스로부터 철학을 사사하도록 허락한다. 그는 네로 황제가 68년에 죽자, 자유 신분을 획득하고 철학을 가르치기 시작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후에 당시 로마 식민지였던 니코폴리스(그리스 서부)에 철학학교를 세워 후학을 가르쳤다. 그의 가르침을 그의 제자인 아리안이 모아 두 권의 책을 냈다. 한 권은 <담화록>이고 다른 한 권은 <인생수첩>이다. <인생수첩>은 <담화록>의 요약이다. <인생수첩>이란 책의 본래 이름은 <엔케리디온>encheiridon이다. ‘엔케리디온’은 그리스어로 ‘손에(케일) 쏙 들어오는(en) 것’이란 의미로 단검短劍이나 수첩手帖을 의미한다. 항상 손에 들고 다녀, 자기 삶에서 군더더기를 갈라내는 단검과 같은 삶의 교본이다. 그는 <인생수첩>을 다음과 같은 느닷없는 그리스어 문장으로 시작한다.
“만물에 존재하는 것들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한 부류는 우리가 하기-나름인 것들이 있고,
다른 부류는 우리와는 상관없는, 해도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기-나름인 것들은, 판단, 충동, 욕망, 혐오. 지적인 활동들입니다. 상관없는 것들은, 신체, 물질, 명성, 관직, 한마디로 우리가 조절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 문장은 스토아철학자들의 주기도문이다. 의미가 있고 아름다운 인생의 출발점은 내가 시도하여 변할 가치가 있어 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과 해 볼 만한 가치가 없는 것들에 대한 구분이다. 에픽테토스는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결과를 산출할 수 없는 것들로, 신체, 재산, 명성, 그리고 고위 관직을 예로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몸이 쇠약하고, 재산은 운명의 여신의 뜻으로 있음과 없음을 반복하고, 명성은 대중에게 의존하고, 고위 관직은 상관자의 변덕에 복종한다.
이와는 반대로, 내 의지로 그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는 것, 한마디로 해 볼 만한 것들이 있다. 타인의 방해를 받지 않고 자유롭고 거침이 없는 온전한 나의 소유들이다. 나의 깊은 생각을 통해 의견, 선택, 의지, 그리고 회피다. 의견이란 나의 개인적인 지적 활동이며, 선택이란 내 삶에 어울리게 버리고 취하는 행위이며, 의지란 더 나은 자신을 위한 노력이며, 회피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을 과감하게 버리는 행위다. 내 손안에 있는 오늘이라는 ‘수첩’이 나에게 단검이 되어 나에게 묻는다.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내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무엇인가?”
배철현 작가는
고전문헌학자이자 작가. 인류 최초 문자들의 언어인 셈족어와 인도-이란어를 전공했다.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제국의 다리우스 대왕이 남긴 삼중쐐기문자 비문에 관한 연구로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건명원建明苑 원장과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블로그 <배철현의 매일묵상>(blog.naver.com/eduba)을 통해 일상의 소소한 관찰을 글로, 유튜브 채널 <배철현의 더코라 THE CHORA>을 통해 동서양 경전과 고전을 통해 얻은 혜안을 영상으로 올리고 있다. 2020년 교육기관 ‘더코라(www.thechora.com)’를 설립하여 청소년과 예술청년들을 위한 인문학교 ‘서브라임’과 경영인들을 위한 ‘코라클래스’를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 『타르굼 옹켈로스 창세기』 『신의 위대한 질문』 『인간의 위대한 질문』 『인간의 위대한 여정』 『배철현의 위대한 리더』 그리고 위대한 개인을 발굴하기 위한 에세이 시리즈 『심연』 『수련』 『정적』 『승화』, 신간 『배철현의 요가수트라 강독1:삼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