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 갓바위와 선본사, 그리고 도수 스님②
[남기고 싶은 이야기] 갓바위와 선본사, 그리고 도수 스님②
  • 강효금 기자
  • 승인 2022.04.19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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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갓바위가 국유에서 선본사 소유가 되기까지
당시 주지인 도수 스님의 힘겨운 과정 기억해야

팔공산 인봉(890.7m)에서 동남쪽으로 600m 떨어진 갓바위(855.2m)는 지극정성으로 기도하면 ‘평생에 한 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는 영험한 곳으로, 널리 알려진 불교 성지이다. 1969년까지 갓바위 불상은 국유였고, 대한불교 태고종인 관암사 주지가 그 관리인이었다. 소재지는 달성군 공산면 진인동 산1-1번지로 달성군 관할이었다. 하지만 현재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 산44-4에 소재한 선본사 사찰 소유로, 불상의 위치는 와촌면 대한리 산44번지로 변경되었다. 갓바위가 선본사로 소유권이 변경된 것은 선본사 주지였던 도수 스님(속명 박찬수朴燦洙)이 '소유권 확인 소송'을 제기하여 대법원 최종 판결로 이루어진 것이다. 선본사로 이전되기까지의 과정을 전 주지인 도수 스님과의 대담과 판결문 등 자료를 근거로 살펴보기로 한다.

어린 시절 이야기에 얼굴 가득 미소가 번지는 도수 스님. 사진 이원선 기자
어린 시절 이야기에 얼굴 가득 미소가 번지는 도수 스님. 사진 이원선 기자

(2) 해인사에서 출가

영주군 봉현면 오현동 566번지, 1935년 8월 15일 이 세상과 연을 맺었다. 반남박씨 가문, 아버지 박명서朴明緖와 어머니 영일정씨 정정운과 사이에서 위로는 형님과 누님이, 아래로는 남동생이 둘 있어 4남 1녀 가운데 셋째였다.

부처님에게로 나를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 봉현면 소재지 봉현초등학교를 다니는 길에 서당이 있었다. 아이들이 서당에서 글을 읽는 소리에 이끌려 들어간 곳. 그 매력에 빠져들고 말았다. 열한 살에 부모님을 졸라 학교를 그만두고 서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거기서 동몽선습, 명심보감, 소학, 통감을 배웠다. 어느 날 동몽선습을 배우는데 “명제 때에 서역의 불교가 비로소 중국으로 들어와 세상을 현혹하고 백성을 속였다. (在明帝時하여 西域佛法이 始通中國하여 惑世誣民하다)”고 훈장님이 가르치셨다. 그때 내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아니면 부처님의 계시가 있었는지 지금도 그 까닭은 알 수 없다. 무엇에 홀리듯 훈장님께 물었다.

“깊이 깨달음을 가르치는 것이 불교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 불교가 어떻게 세상을 현혹한다는 말입니까?”

그때 학동 8명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지나 훈장님에게로 옮겨졌다.

훈장님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것은 부석사 절에 가서 물어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하였다. 그길로 부석사로 달려갔다. ‘봉의’ 스님에게 여쭈니, 다시 그것은 합천 해인사에 가서 물어보라고 했다. 그때 열두 살이었다. 점촌역에 가서 기차를 타고 김천에서 내려, 걸어서 해인사를 찾아갔다.

해인사에 도착하여 원주院主스님(사찰의 사무를 주재하는 스님)께 스님이 되고 싶어 찾아왔다 했다.

“초등학교 공부를 마치고 오너라. 어서 집으로 돌아가거라.”

하지만 그냥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무슨 마음이었을까? 또래보다 덩치가 컸던 난 배에 힘을 잔뜩 주고, 있는 힘을 다해 그냥 돌아갈 수 없노라고 했다.

한참을 망설이던 스님은

“어서 아궁이에 군불을 때거라. 그릇도 깨끗이 씻어놓고.”

절에서의 첫 임무였다. 그 후 스님은 원당암으로 나를 이끌었다. 원당암은 해인사보다 먼저 신라 애장왕 3년(802)에 지어졌다. 거기서 마당을 쓸며, 속세의 마음을 씻었다. 때로 노스님의 벼루에 먹을 갈거나 군불을 지피며, 모든 세속의 찌꺼기를 버리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고자 기도했다.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날짜. 1956년 5월 5일, 스님이 붓을 잡고 “無春三月 李花無色, 脫衣神將 登龍門”이라 쓰셨다. ‘봄이 없는 3월에 이화(이승만)는 보잘것없다. 탈의(示) 신 장군(申장군은 신익희申翼熙)은 등용문에 오른다’라는 뜻이었다. 나에게는 그 내용이 마치 정감록의 예언처럼 들렸다. 그 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신익희는 유세차로 이동 중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내 나이 열일곱이었다. 조금 있으니 일주문 앞으로 통곡 소리가 들려왔다. 그 길로 큰절인 해인사로 건너갔다.

해인사에 다다라 3년을 강원講院에서 공부했다. 함께 수학한 친구는 38명이었다. 낭랑하게 스님들이 경을 읽는 소리가 더없이 좋았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山堂靜夜坐無言(산당정야좌무언) 고요한 절간에 홀로 앉아 있으니

寂寂寥寥本自然(적적요요본자연) 적적하고 고요함은 본래 자연 그대로라.

何事西風動林野(하사서풍동임야) 무슨 일로 가을바람 수풀을 흔들어

一聲寒雁唳長天(일성한안려장천) 찬 기러기 외마디 우는 소리 하늘 멀리 들리누나.

 

누구의 시냐고 물었더니 중국 남송 때 야보도천冶父道川 스님의 선시禪詩라고 했다. 마음 깊이 그 선시를 간직했다.

해인사에서 지월指月스님을 은사로 수계受戒를 받았다. 법명은 ‘도수道秀’로 정했다. 동네 친구인 김재호에게 오래간만에 편지를 썼다. 그간에 나의 사정과 계를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얼마 뒤, 아버지가 해인사로 찾아오셨다.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사흘을 같이 지냈다. 헤어지던 날, 아버지의 ‘염려’와 ‘연민’이 담긴 그 눈길은 잊을 수 없다. 당시 스무 살, 스님이 되어 충북 법주사의 말사인 금수산 정방사淨芳寺 주지 자리를 맡았다. 그 뒤 제천군 월악산 덕주사德周寺 주지로, 1961년 5월 군사정변으로 육군소장 최세인崔世寅이 충북지사(1962.3~1963.1)로 부임하며 사찰재산 관리인으로 임명되었다. 그다음 월정사 말사인 울진 불영사不影寺 주지로 부임하였다가 그만두었다. 읍에 있는 동림사東林寺 주지를 맡아달라는 것도 마다하고, 사임하는 편지를 월정사로 보냈다. 그길로 영천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버스 기사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타이어가 터져서 더 이상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차로 갈아타고 가까스로 영천에 도착하여 목적지인 은해사에 이르렀다.

은해사는 당시 적막강산인데 일주일 내내 마당 청소를 하고 잡초를 뽑고 있으니, 이진용 주지 스님이 다가오셨다. 절에서 승복을 깨끗이 빨아 입고, 주지 스님과 함께 선본사 갓바위에 올랐다. 선본사와의 첫 인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