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 갓바위와 선본사, 그리고 도수 스님①
[남기고 싶은 이야기] 갓바위와 선본사, 그리고 도수 스님①
  • 강효금 기자
  • 승인 2022.03.31 12: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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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수 스님은 1935년생으로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초까지 선본사 주지를 지냈습니다.
이 이야기는 도수 스님(속명: 박찬수)의 대담과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성했습니다.
-편집자

(1) 선본사와의 인연

 

 

“부처님께 절을 하거라!”

주지 스님의 이야기가 적막을 깨웠다. 인자하지만 내 속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 거대한 불상. 내 존재는 너무 작아 사라질 듯 위태로웠다.

공손하게 손을 모아, 갓바위 부처님께 인사를 드렸다. 한 번, 두 번…. 스님이 시키는 대로 고개를 조아려 수없이 절을 했다.

그다음 선본사로 발길을 돌렸다.

“주지 역할을 잘해야 한다. 부처님께 절하며 말씀드렸으니, 이제 선본사를 잘 이끌어야 한다.”

은해사의 말사였던 선본사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했다. 주지 스님이 은해사로 떠나고, 자리에 누웠다.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할 수 있을까. 잡념을 내쫓으며, 덮을 이불조차 없는 방에서 목침을 벗 삼아 잠을 청했다. 서까래 틈새로 밤하늘에 별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뒤척이다 설핏 잠이 들었는데, 지붕으로 쏟아지는 빗소리에 눈을 떴다. 빗물이 벌써 방을 적시고 있었다. 새벽 세 시, 예불을 마치고 아침거리가 없어 동화사로 발길을 돌렸다. 죽이 나왔다. 죽 공양을 마치고, 첫차에 몸을 싣고 탁발을 떠났다.

무너진 방 구들이며, 썩어 버린 이엉 사이로 빗물이 쏟아지는 거처. 불을 때면 연기가 방을 가득 채우고. 가마솥을 열면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절. 모든 게 막막했다.

선본사에서의 둘째 날. 새벽에 약초를 캐던 사람이 목을 축이러 들렀다. 초라한 절간의 모습을 본 그 사람이 말을 건넸다.

“아이구, 손을 많이 봐야겠심더.”

잡일을 할 줄 안다는 그에게 품삯을 주겠노라 하고 보수가 시작되었다. 풀을 베고 말려 지붕이 올라가고, 새 구들이 자리잡았다.

“둥둥둥둥”

어디선가 잠을 깨우는 꽹과리 소리가 들렸다. 선잠에서 깨어 나갔더니, 검은 보자기를 덮어쓴 사람 위를 칼을 든 무당들이 뛰어넘으며 굿판이 벌어졌다. 잠자코 마당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알록달록한 휘장을 날리며 장구와 꽹과리, 북소리가 동틀 무렵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해인사에서 공부할 때였다. 조명봉이라는 선생님이 강의를 하다 말고, 너희는 나가서 무당을 괄시하면 안 된다고 하셨다. 서른여덟 명의 동급생 가운데, 어린 내가 손을 번쩍 치켜들고

“우째 그라믄 안 되는데예?”하고 물었다.

선생님은 무당은 준 포교사라 설명하셨다. 무당한테 점을 하러 가면, 산신각에 가서 명을 빌고, 칠성각에 가서 자식을 점지해 주십사 비니. 무당을 업신여기면 안 되노라 하셨다. 어린 나이에 선생님의 말씀은 큰 충격이었다. 모두 다 부처다. 부처님을 잘 섬겨야 복을 받는다.

돼지머리에 온갖 떡이며, 과일, 곡식이 차려진 굿상을 보며 선생님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눈 앞에 펼쳐진 굿판을 구경하는 내가 신기했는지, 굿판이 끝나고 무당들은 수군대더니 한 사람이 앞으로 다가왔다. 다른 스님들은 우리가 오면 내쫓는다고 야단인데, 이런 스님은 처음이라며 공손하게 합장을 했다. 장독대로 가서 스무 개쯤 되는 항아리를 들추어 보았다. 고추장도 간장도 된장도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항아리를 보더니, 산을 따라 무겁게 지고 온 두텁떡이며 갖가지 과일, 쌀이며 팥을 내어놓았다.

“스님! 이 절에서 이걸 다 받으십시오.”

그리고 다음 동지에 올 터이니 건대(승려가 시주를 얻을 때 쓰는 종이 주머니)를 달라고 했다. 쌀 한 됫박이 들어갈 정도의 건대. 출가한 자식을 걱정하며 어머니가 지어준 건대를 건넸다. 한 장씩 나눠줬더니, 왜 한 장만 주냐며 어떤 이는 다섯 장, 어떤 이는 열 장을 청했다. 금방 백여 장의 건대가 동이 났다.

동짓날, 무당들이 이끄는 한 무리가 시끌벅적하게 절에 도착했다. 그들이 지고 온 쌀 일곱 가마와 건대 가득 담긴 곡식들. 일꾼의 품삯을 걱정하던 나에겐 귀한 선물이었다. 담배 한 갑에 3원, 쌀 한 가마니에 2,700원, 좁쌀 한 가마 400원이던 시절. 그들이 가지고 온 쌀을 팔아 일꾼들의 품삯을 치렀다. 신이 난 일꾼들은 열심히 절간 곳곳을 수리하고, 절은 조금씩 제 모습을 찾으며 신도들의 발길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