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 갓바위와 선본사, 그리고 도수 스님⑤
[남기고 싶은 이야기] 갓바위와 선본사, 그리고 도수 스님⑤
  • 강효금 기자
  • 승인 2022.08.30 1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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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바위 불상을 바라보는 스님의 옆모습에는 세상일에 달관한 이의 담담함이 묻어난다.
갓바위 불상을 바라보는 스님의 옆모습에는 세상일에 달관한 이의 담담함이 묻어난다.

 

◆ 재판 과정에 얽힌 이야기

처음부터 법원의 판단을 빌려 갓바위 불상의 소유권을 바로잡고자 하는 생각은 없었다. 갓바위 불상 소유권 확인 소송을 하기 전에 행정당국에 여러 차례 민원을 제기하고 서울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에도 이야기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당시 문화재관리국 하갑청(1967.7.24~1969.2.26 재임) 국장을 7차례나 찾아가 해결책을 요구하였지만, 돌아온 답변은 재판을 통하지 않고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당시 선본사 신도인 한상수 씨와 같은 고향인 합천 출신 하종홍(1917~2007) 변호사를 소개받았다. 하 변호사의 사위가 서윤홍(1928~2018) 부장판사의 배석판사를 맡고 있으니, 소송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 선임한 이유였다. 그 후 갓바위에 오가며 준비하던 하종홍 변호사는 “나는 유교는 잘 알아도, 불교는 잘 모릅니다. 경북대 정주동 박사와 친한 대구 시내 보현사 거사림 회장인 문양(1921~2005) 변호사에게 이 일을 맡기면 좋겠습니다”라고 하여, 1심 종결 전에 변호사를 교체 선임하였다.

이 소송에서 결정적 증거가 된 선본사 대웅전 불상에서 나온 ‘선본사사적기’를 가지고 경북대 정주동 박사에게 가서 번역을 청했다. 정 박사는 자신은 국문학자라 한학을 하는 분이 하면 좋겠다고 하여, 그길로 양산 통도사 벽안(1901~1987) 주지 스님을 찾았다. 벽안 스님은 조계종 감찰원장 월하(1915~2003)스님과 함께 조계종에 가는 길이니, 차 안에서 보고 이야기하자면 손을 끌었다. 얼떨결에 올라탄 자동차 안, ‘선본사사적기’를 찬찬히 훑어보시던 벽안스님은 무릎을 ‘탁’ 치며 “이 ‘선본사사적기’는 잠잘 때도 가슴에 안고 자소. 이것만 잘 보관하고 있으면 반드시 승소합니다”라고 하였다.

스님의 말씀대로 이 책의 내용을 사진으로 찍어 소송 과정에서 증거로 제출하였다. ‘사진’이라는 것이 흔치 않은 시절이라, 그 사진 촬영에만 쌀 몇 가마니의 비용이 들었다. 그렇게 ‘선본사사적기’는 이 재판에서 승소하는데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돌이켜 봐도, 이 모든 일은 중생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부처님의 가피력 덕분이었다.

처음 소송을 제기한 것이 1966년 3월. 1심 판결 선고까지 3년 5개월이 소요되었다. 당시 1심 판결 후 피고 보조참가인 관암사 주지 우효생은 대구고등법원 항소심에서 소송대리인 박찬 변호사와 최상택 변호사로 교체되었는데 박찬 변호사는 불교 신자로 나와 같은 성씨였다. 나는 지역에서 수재로 잘 알려진 박찬 변호사에게 “변호사님은 불교 신자면서 조계종을 도와야지 어찌 대처승 사찰을 돕습니까? 앞으로 서로 껄끄러우니, 박 변호사님은 법정에 나오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하고 이야기하였다. 내가 한 이야기 때문인지, 박 변호사는 그 이후로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

국가를 상대하여 소송하기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법원까지 이르는 3심 과정에서 내게 가해진 고난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제반 경비에 대한 물질적인 것은 물론 정신적 고통을 견디기 힘들어 매일 부처님께 자비를 구했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얘기는 내 가슴을 파고들어 깊은 상처를 남겼다. 동화사 쪽에서는 소송할 돈이 있으면 동화사 선원에 찰밥 공양이나 두부 공양 시주나 하라 하고, 은해사 쪽에서는 승려가 사찰 관리와 수도만 하지 쓸데없이 소송하며 날뛴다고 핀잔을 주기도 하였다. 이 모든 일은 피고 측 보조참가인으로 나선 관암사 쪽에서 여러 군데 압력을 가해 생긴 일이었다. 심지어 명절 때는 외지에서 동원된 청년들이 사찰에 찾아와 협박하기도 하며 난동을 부리고, 회유와 신체적 피해를 보기도 하였다. 이렇게 대법원 최종심까지 4년 6개월 동안 길고 긴 재판과정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