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62)샛바람 불어도 봄은 오고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62)샛바람 불어도 봄은 오고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2.03.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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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는 노랑저고리 입고, 들판은 풀꽃치마 두르고 봄 마중
트고 갈라졌던 농부의 손발, 논바닥, 메주도 반겨

1967년도 올해처럼 1월 5일이 소한(小寒) 3월 5일이 경칩(驚蟄)이었다. 해는 두 달 만에 1시간 반 남짓 길어져 있었다. 따스한 봄볕에 겨울잠 자던 개구리가 ‘놀라서(驚)’깬다? 익살이다. 놀라서 깬 것은 개구리만이 아니었다.

‘고래전’으로 가는 길에는 소달구지가 다녀 패인 자국에까지 새싹이 돋고 있었다. 제비꽃, 쑥, 민들레, ‘씬냉이’(씀바귀, 고들빼기), ‘뺍짜구’(질경이), 토끼풀은 길바닥에, 원추리, 여뀌, 바랭이, 고마리, 강아지풀은 도랑에 많았다. 도랑은 ‘미뿌랑’(묘터) 근처 웅덩이에서 솟아나는 물로 언제나 축축했다.

농부는 뒷간 채전 밭의 구덩이를 파헤쳤다. 무는 국으로 생채로 먹고 생선찌개 끓이는데 썰어 넣었다. 꽁치, 고등어, 갈치, 양미리, 오징어 등이었다. 포항이 가까워 생선이 많이 났지만 가난한 밥상은 무 넣은 된장찌개일 때가 대부분이었다.

한 소쿠리가 채 되지 않는 무에는 노란 싹이 한 뼘 정도 나 있었다. 내친 김에 김장독도 파냈다. 그날 저녁 식탁은 시큼한 배추김치로 행복했다. 자식들은 부엌칼로 밑동만 잘라온 김치를 손으로 쭉쭉 째서 밥숟갈에 걸쳤다. ‘술총’(숟가락총) 끝에 꿰서 먹는 짠지도 그만이었다. 부잣집에는 보리가 익어갈 때야 독을 비웠다.

앞거랑에는 얼음이 풀려 다시금 물이 흐르고 누런 색깔로 널브러져 있던 줄피기(부들) 사이로 새잎이 고개를 내밀었다. 큰거랑 둑의 버들강아지(갯버들)는 눈망울을 한껏 부풀렸다. 논둑 양지바른 곳에는 개불알풀, 광대나물, 별꽃이 자리다툼을 벌이고 겨우내 얼었던 곰보배추도 생기를 되찾았다.

그 동안 논둑은 마른 풀로 주황색이거나 연한 갈색이었는데 정월대보름 즈음하여 쥐불놀이를 하거나 해충을 없앤다고 논둑을 태워서 검게 변해 있었다. 그 논둑이 새봄을 맞아 다시금 연한 녹색으로 변한 것이다. 멀리서보면 들판은 한 폭의 수채화 같고 처녀가 기초화장에 풀잎치마를 입은 것 같았다.

논갈이 나가던 소가 풀 향기에 입맛을 다셨다. 소풀은 풀이 더 흔해지면 그때부터 먹였다. 이는 ‘생풀(새로 돋은 풀)을 먹은 소는 이빨이 곱아(시큰거려서) 여물을 씹지 못 한다’는 이유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풀 맛을 보면 그때부터 여물을 외면하여 여위게 된다’는 생활의 지혜였다.

봄풀 중에 유독 거슬리는 것은 보리밭 골에 난 뚝새풀이었다. 모든 사람들은 이 풀을 ‘독새’라고 불렀다. 농부가 보리밭 맨다는 것은 독새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독새는 벼농사의 피(잡초의 한 종류)와 같은 존재로 보리가 먹을 거름을 가로채고 보리보다 일찍 자라 그 씨앗을 땅에 떨어뜨렸다.

보리밭 매기의 초벌매기는 독새가 어릴 때로 그냥 호미로 흙을 갈아엎으면 됐다. 그러다가 더 자라면 흙으로 묻고, 호미로 감당이 불가능할 때면 뽑거나 낫으로 벴다. 농부의 독새 씨름은 보리가 누런빛을 띨 때까지 계속됐다.

신나게 소풀 하러가는 소녀들 뒤로 소평마을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신나게 소풀 하러가는 소녀들 뒤로 소평마을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농부는 햇살 따사로운 봄날 하루를 잡아 지호어른을 놉으로 해서 지붕을 이었다(갈았다). 초가삼간과 아래채 그리고 헛간을 이는데 얼마만큼의 이엉과 새끼가 필요한지는 연중행사이므로 경험상 알고 있었다. 농부는 이를 위해서 겨우내 낮에는 이엉을 엮고 밤에는 새끼를 꼬아 쟁여두었다.

소년은 사다리 타고 지붕으로 올라가 낫으로 헌 지붕 걷어내는 것을 보고 등교했다. 이엉은 지붕의 아랫부분부터 시작해서 꼭대기 쪽으로 빙빙 돌렸다. 다 덮으면 별도로 만든 용마루를 덮고 지붕 전체를 새끼줄을 사용해서 가로세로 묶었다. 하굣길에는 멀리서부터 지붕을 살폈다. 집에 가까워지면서 샛노란 빛깔이 눈에 들어왔다. 신부가 노랑저고리로 단장한 것 같았다.

부지런한 농부에게는 농한기(農閑期)가 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소죽을 끓여놓고 개똥망태 어깨에 걸고 호미 들고 개똥 주우러 나갔다. 개들이 놀던 곳을 낮에 봐 두었다가 새벽 일찍 집을 나섰다. 비료가 귀하던 시절이라 인분은 물론 가축의 똥으로 퇴비를 장만해야 했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두지’(斗庋, 뒤주)에 담아 둔 나락을 정미소에 내기 위해서 겨우내 새끼를 꼬아 가마니를 쳤다.

건조한 날씨와 찬바람에 농부의 손발이 트고, 추녀에 달아놓았던 메주가 트고, 가뭄에 논바닥이 텄다. 손발의 자주 트는 데는 손가락 마디와 주먹을 쥐었을 때 손바닥 접히는 부분과 그리고 발뒤꿈치였다. 굳은살이 박히는가 싶더니 곧 갈라져 속살을 빨갛게 드러냈다. 갈라진 곳은 찬바람과 찬물이 닿으면 칼에 베인 듯 따갑고 쓰렸다. 농부는 반창고로 갈라진 데를 때우고 틈틈이 소죽솥에 데운 물로 때를 불리고 조약돌로 밀었다.

처마 위에 달아놓았던 메주도 말라 벌어졌다. 한겨울에는 댕댕이 덩굴로 만든 ‘산데미’(버치 모양의 아가리가 벌어진 바구니)에 담아서 멀방(안방의 옆방)에 들여 띄웠다. 메주 뜨는 냄새에 머리가 지끈거렸으나 참아야 했다. 청국장 발효할 때 나는 곰팡이 냄새였다.

햇볕 가득한 날, 농부의 아내는 비워 놓았던 장독간 큰 독에 짚단에 불을 붙여 독안을 소독하고 장을 담갔다. 장독 아가리에는 삼베주머니가 매달린 굵은 나무막대가 걸쳐져 있었는데 그 주머니 안에는 굵은 소금이 들어 있었다. 장독뚜껑은 저녁에는 덮고 낮에는 열어서 봄볕을 쪼여야 했다. 군것질거리가 없는 아이들은 오며가며 손가락을 담가 그 물을 찍어 먹었다.

새봄과 더불어 마을 청년 여러 명이 수원, 대구, 울산 등지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떠났다. 소평교회는 반사(班師)할 사람을 못 구해 쩔쩔맸다. 가뜩이나 허전한데 봄 날씨는 변화무쌍해서 따스하다가도 가끔 샛바람이 불어 몸을 움츠리게 했다. ‘샛바람에 목장 말 얼어 죽는다’는 말이 있었다. 뉴스는 꽃샘추위가 며칠간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3월 중순에 때아닌 얼음이 얼고 함박눈이 내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봄비가 내렸다. 단비에 갈라졌던 논바닥이 눅눅해지고, 얼었던 보리는 뿌리를 뻗기 시작하고, 손발은 트는 것을 멈췄다. 앞도랑 물에 개구리 두어 마리가 흐느적거리며 돌아다녔다. 초가지붕을 타고 소리 없이 떨어지는 빗물을 바라보던 소년은 그리운 누나 생각에 눈물을 글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