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64)보리밭 종달새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64)보리밭 종달새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2.05.23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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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새, 도투라지 어우러진 보리밭 위로
종달새 힘차게 날아올라 우짖어

제비는 4월 마지막 주에 왔다. 제비들은 새벽부터 빨랫줄에 늘어앉아 쉴 새 없이 “재조갈 재조갈” 남국(南國)의 언어로 조잘댔다. 5월초부터는 처마 밑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무논이 가까이 있고 널려있는 게 검불이라 집짓기 좋고 잠자리 등 곤충이 많아서 먹이 구할 걱정 안 해도 되니 소평마을은 천혜의 조건을 갖춘 셈이었다.

농부는 제비 소리를 뒤로 하고 보리밭 매러 들로 나갔다. ‘고래전’ 논은 무논이라 어쩔 수 없지만 다른 데는 2모작이 필수였다. 안강들, 양동들, 한들, 섬배기, 모래골은 보리 또는 밀로 덮였다. 야마리는 3호 수문 근처로 너무 멀었다.

보리밭 매기는 무릎 연골에 가장 무리가 간다는 ‘쪼그려 앉기’로 오리걸음을 걷는 일이었다. 상대는 ‘독새’(뚝새풀)이었다. 어떻게 해서 ‘독새’로 불리게 됐는지 알 길은 없지만 추측컨대 매고매도 끊임없이 ‘독하게(끈질기게) 돋아나는 새’에서 연유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새’는 ‘볏과의 식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었다.

독한 풀 하면 쇠비름도 있었다. 쇠비름은 “방구(바위) 위에 얹어놓아도 열흘 간다”고 알려져 있었다. 보리는 이랑에 있고 풀은 고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랑과 이랑 사이 움푹 팬 곳이 고랑이다. 논둑에는 키 작은 억새 사이로 광대나물, 벼룩나물, 갈퀴덩굴, 갈퀴나물, 별꽃나물 등이 자라고 있었는데 호시탐탐 보리밭을 넘봤다.

잡초 중에 명아주도 있었다. 키가 1m 정도로 자랐을 때 베어 말리면 줄기가 단단해져서 지팡이로 제격이었다. 이 한해살이풀을 마을사람들은 ‘도투라지’라고 불렀다. 잎의 뒷면이 도톨도톨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개구쟁이들은 이 풀로 곧잘 장난을 쳤다. 도투라지 한 줄기를 꺾어 들고 능청스럽게 물었다. “이 풀 이름이 뭐지?” 그것도 모르느냐는 표정으로 동무가 대답했다. “도투라지” 개구쟁이가 쾌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엄마 × 도톨도톨하단 말이지” “요놈의 새끼!” 쫓고 쫓기는 경주가 시작됐다. 논둑길을 달리고 보리밭을 가로 질렀다. 보통은 그냥 끝나지만 때로는 코피가 터지도록 싸웠다. 입술이 당나발이 돼도 신원(伸寃)할 데가 없었다.

명아주 잎 뚫기 놀이도 했다. 왼손 주먹을 가볍게 쥐고 그대로 들어 올리면 엄지와 검지로 만든 동그란 구멍이 보인다. 그 위에 풀잎 하나를 따 얹고는 오른 손바닥을 들어 내리쳤다. “빵!” 소리와 함께 풀잎이 동그랗게 뚫렸다. 몰래 남의 귓가에 대고 터뜨리는 놀이였다.

봄에 나는 새싹은 이름에서 보듯 대부분 나물로 해 먹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쇠비름과 명아주 잎도 나물로 먹었다. 독새는 씨앗이 여물어 갈 무렵 털어서 그 씨앗에 사카린을 넣고 볶아 먹었다. 그렇게 보릿고개를 넘겼다.

소평마을은 논보리를 갈았기 때문에 ‘보리논’이 곧 ‘보리밭’이었다. 늦가을에 ‘훌치’(쟁기)로 ‘보릿골’을 타고 그 안에 보리씨를 뿌렸다. 그리고 ‘끄징개’(끌개)로 끌고 ‘곰배’(곰방메)로 흙덩이를 깨서 묻었다.

보리는 겨울을 나는 작물이다. 보리밭 매기는 새봄과 함께 시작됐다. 초벌매기는 호미로 그냥 긁으면 됐다. 독새가 뿌리를 못 내리도록 하는 것이었다. 보리가 농부의 종아리 높이로 자라면 두벌매기가 시작됐다. 그때는 뿌리를 북돋워줘야 했다. 자연스럽게 고랑에 있던 독새는 뽑히고 보릿골은 ‘이랑’이 됐다. 5월이면 무릎높이로 자라고 보리가 팼다. 세벌매기는 호미보다는 ‘구아’로 고랑에 무성한 독새를 찍어냈다. 구아는 괭이의 쇠붙이가 작은 삽 모양인 농기구였다. 독새는 두 손으로 뽑다가 나중에는 그냥 낫으로 베 냈다. 보리밭 매기는 보리가 누런빛을 띨 때까지 계속됐다.

마을 동문계원들은 1980년 5월 16일 망중한으로 경주 여행을 했다. 보문탑 앞에서. 정재용 기자
마을 동문계원들은 1980년 5월 16일 망중한으로 경주 여행을 했다. 보문탑 앞에서. 정재용 기자

독새는 보릿골 빼곡히 자라고 있었다. 보리밭 매기는 왼손으로 독새를 움켜잡고 오른손으로 호미를 잡고 독새의 뿌리를 찍어 끌어당기는 일, 뽑혀 나간 독새는 농부의 뒤쪽 군데군데에 무더기로 쌓였다. 이 논 매고 나서 저 논 매야 하고, 그만 매고 더 매고는 농부가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잡초에게 달려 있었다.

잡초는 끈질겨서 농부들은 “매고 돌아서면 자욱하다” 탄식했다. 논 서너 도가리를 순회했다. 고랑은 긴 날(직사각형 논의 긴 쪽 방향)로 돼 있었다. 한 고랑 왕복하고 나면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댓정(덧정) 나이(ない, 없다)다” 처음에는 허리를 구푸려서 매다가 나중에는 ‘조잖아서’(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오리걸음으로 맸다. 논둑에 나와서는 남은 보리 고랑을 헤아렸다. ‘게으른 농부 보리 고랑 세는 게 일이다’, ‘게으른 놈 밭고랑 세다가 해 저문다’는 말이 있었다.

한 논의 시작과 마무리 시차를 줄이기 위해 놉을 해서 맸다. 맨 독새는 쇠비름처럼 그냥 두고 비가 오면 되살아나기 때문에 논둑으로 안아다 날랐다. 독새는 소풀로 안성맞춤이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나설 때는 독새가 있어서 따로 소풀 할 걱정은 없었다. 낫등을 땅에 댄 후 낫자루가 발쪽으로 가도록 해 놓고 두 발로 낫자루를 잡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독새를 낫 날에 대고 잡아당기면 됐다. 독새 베고 소풀 하고 일거양득이었다.

양동산 쪽에서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청보리가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는 양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김종상(1935~)의 동시 ‘어머니’가 있다. “들로 가신 엄마 생각, 책을 펼치면/ 책장은 그대로 푸른 보리밭./ 이 많은 이랑의 어디 만큼에/ 호미 들고 계실까 우리 엄마는.// 글자의 이랑을 눈길로 타면서/ 엄마가 김을 매듯 책을 읽으면,/ 싱싱한 보리 숲 글줄 사이로/ 땀 젖은 흙냄새, 엄마 목소리. [김종상의 ‘어머니’ 전문]

종달새 어미가 밭 매는 보리밭 위로 날아올라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의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처럼 우짖고, ‘교향곡의 아버지’로 불리는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 오스트리아)의 교향곡 ‘종달새’처럼 노래했다. 종달새의 경쾌한 소리는 푸른 하늘 멀리 퍼져나갔다.

이 즈음 초등학교 붓글씨 수업은 ‘보리밭 종달새’ 쓰기였다. 8절지 습자지(習字紙)를 세로로 놓고 글자 수에 맞춰 칸을 접은 후, 오른쪽부터 한 칸씩 아래로 써 내려가면 됐다. ‘보리밭’이 오른쪽 ‘종달새’가 왼쪽이었다. 학년 반 이름은 그 다음 왼쪽에 작은 글씨로 썼다. 싱그러운 교실, 웃고 재잘대는 아이들은 보리밭 종달새 그대로였다. 잘 된 작품은 교실 뒤편 솜씨자랑 코너에 게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