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63)책 읽는 소리 낭랑하게 흐르던 골목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63)책 읽는 소리 낭랑하게 흐르던 골목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2.04.20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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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롱불 등잔 둘러 앉아 이야기 경청
화내고, 웃고, 울고, 혀 차며 공감

부지런한 농부는 논 갈고 보리밭 매는 일로 바쁜 가운데도 틈틈이 지게를 지고 양동산으로 나무하러 갔다. 길은 봇도랑 따라 ‘야마리’ 쪽으로 질러가도 읍내 가는 거리만큼 멀어서 도시락 매달고 하루 한 ‘행비’(차례)로 만족해야 했다. 양동산은 대부분이 떡갈나무였다. 대나무 ‘까꾸리’(갈퀴)로 긁어, 오리나무 가지 꺾어 길게 펴고 그 위에 쟁였다. 다 되면 새끼줄로 동여 지게에 얹고는 거북이마냥 목을 길게 빼고 걸었다. 깔비(솔가리)를 하기 위해서는 ‘안계못’ 쪽으로 더 들어가야 했다.

나뭇짐 위에는 국어책에 실려 있던 동시 ‘지게꾼과 나비’처럼 진달래가 한 움큼 꽂혀 있었다. “할아버지 지고 가는 나무지게에/ 활짝 핀 진달래가 꽂혔습니다.// 어디서 나왔는지 노랑나비가/ 지게를 따라서 날아갑니다.// 아지랑이 속으로 노랑나비가/ 너울너울 춤을 추며 따라 갑니다.” [신영승, ‘지게꾼과 나비’ 전문] 마을사람들은 ‘진달래’보다는 ‘참꽃’이라고 많이 불렀다.

마을사람들은 일을 하고 피곤한 가운데도 저녁을 일찍 먹고는 책 읽는 집으로 모여들었다. 심청전, 흥부전, 장화홍련전, 배비장전, 이춘풍전, 홍길동전, 옥단춘전 등 고전소설을 목청 좋은 한 사람이 읽고 나머지는 귀 기울여 듣다가 주인공의 심정으로 웃고, 울고, 화내고, 혀를 찼다. 한 문장이라도 놓칠세라 변소 갈 시간에는 낭독을 중단시켰다. 방문을 열자 바람에 호롱불이 펄럭였다.

1981년 교회 춘계심방 때, 방이 비좁아 마루에 앉아 있다. 정재용 기자
1981년 교회 춘계심방 때, 방이 비좁아 마루에 앉아 있다. 정재용 기자

‘새말댁’에는 ‘한양오백년가’(漢陽五百年歌)가 있었다. 이 책은 한양에 도읍한 조선왕조 오백년의 흥망성쇠를 노래한 장편 역사가사로서 국립한글박물관에는 그 한글필사본이 소장돼 있다. 이 책의 결말에 필사자의 심경을 밝히고 있는 게 재미있다.

훗날 연구 결과 사공수(司空檖, 1846~1925)가 1913년에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세조에게 사육신(死六臣)이 고초를 당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세조대왕 그 말 듣고 분기가 탱천하여/ 성삼문 아들 삼 형제를 일시에 잡아들여/ 맏아들 목을 베며, 이러해도 항복 않나/ 성삼문 하는 말이, 자식이 놀라우냐/ 둘째 아들 베이면서, 이러해도 항복 않나/ 성삼문 하는 말이, 삼족을 멸한대도/ 평생에 먹은 마음 추호나 변할쏘냐/ 세 살 먹은 셋째 아들 전정 앞에 박살하니,/ 성삼문 거동 보소. 눈물이 비치거늘…”

성산문은 소 네 필이 끄는 거열이순(車裂以徇, 사지를 찢어 죽여 시신을 전시)으로, 박팽년은 단근질(불에 달군 쇠로 몸을 지짐)로, 하위지는 말밤쇠(철조망) 위를 걷게 하고 타살로, 유응부는 끓는 가마솥에 넣어, 이개는 칼을 물고 엎어지게 하고, 유성원은 쇠 집게로 살점을 뜯어 죽었다.

그 집에는 ‘호식이의 일기’라는 만화책도 있었다. 주인공 호식이와 쇼로기는 도둑이었다. 둘은 달빛이 거의 없는 그믐밤을 택하여 높은 담장을 타 넘었다. “쿵!” 소리에 놀란 개가 짖어댔다. 밖에서는 몰랐더니 방 하나에 불이 켜져 있고 거기서 악기 연주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망설이던 쇼로기가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우리 집 강아지는 복슬강아지 어머니가 빨래가면 멍멍멍 쫄랑쫄랑 따라가며 멍멍멍” (김태오 작사 정동순 작곡 ‘강아지’ 1절) 악보의 음표가 흘러내렸다. 그 중의 하나가 개의 이빨에 끼였다. ♫ 음표였다. 개는 담장 밑에 머리를 박고 낑낑거렸다.

방문을 빠끔히 열고 보니 젊은 음악가가 눈을 감은 채 열심히 첼로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는 전혀 눈치를 못 채는 것 같았다. 방 안에는 음표가 가득히 쌓여 있었다. 도둑은 매고 있던 자루를 벌리고 부지런히 음표를 쓸어 담았다. 갑자기 어디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이어서 “삐꺽삐꺽” 거렸다. 처음 소리는 음악가의 활이 호식이의 귀를 뚫는 소리였고 뒤의 소리는 활을 밀고 당길 때 내는 소리였다. 깜짝 놀란 음악가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자기의 활이 비녀같이 호식이의 귀에 꽂혀 있는 것을 보고는 그제야 도둑인 줄 알고 고함을 질렀다. “엄마, 도둑이야!” 부리나케 도망을 치던 호식이가 일갈했다. “다 큰 녀석이 엄마래” 이 방 저 방에서 불이 켜지고 식구들이 몰려 나왔다.

다급해진 쇼로기가 황급히 어깨에 메고 있던 자루를 내려 주둥이를 벌렸다. 순간 “휘리릭” 소리와 함께 콩나물 음표가 꼬리를 물고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첫머리가 그믐달에 걸렸다. 호식이와 쇼로기는 콩나물 사다리에 올라타고 유유히 사라졌다. 개는 그때까지도 낑낑댔다.

‘방국댁’에는 월탄(月灘) 박종화(1901~1981)의 장편소설 '임진왜란'이 있었다. 1957년 초간본 전체 6권이었다. ‘용강댁’에는 정청일 씨가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보던 ‘전후(戰後)세계문학전집’이 있었다. 교회 옆집 ‘새깨댁’에는 김용한 씨가 보던 영국 소설가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의 ‘천로역정’(天路歷程)과 독일인 수도사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등이 있었다.

시내산 밑에서 만난 기독도와 전도자. 천로역정 p.42 범우사
시내산 밑에서 만난 기독도와 전도자. 천로역정 p.42 범우사

천로역정은 성경을 읽던 주인공 기독도(基督徒)가 죽음과 심판의 두려움에 고뇌하다가 전도자의 도움으로 천성(天城)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그린 책이었다. 이는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에 의해 1895년에 최초로 한글 번역되어 소개됐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첫머리의 ‘세상이 모든 헛된 것들을 경멸 한다’는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날이 밝으면 일터로 나가야 하고, 소년은 낼모레가 시험인데 밤이 이슥하도록 소설을 읽었다. ‘계림문고’는 이틀 정도면 한 권을 뗄 수 있었다. 호롱불이 가늘어지는 것은 석유가 다 돼 간다는 신호였다. 석유는 장날에 나가 ‘댓병’(됫병)들이로 사다놓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