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가천마을의 다랭이논과 암수바위!
남해 가천마을의 다랭이논과 암수바위!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1.05.31 1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모양도 제각각, 크기도 제각각으로 생겨나게 된다
삿갓을 들었더니 그 밑에 한 배미가 있었다
쓰임새에 맞게 얼마나 잘나오는 데 소를 부립니까
남해 다랭이마을 전겅. 이원선 기자
남해 가천 다랭이마을 전겅. 이원선 기자

남해 가천 다랭이마을(명승 제15호)에서는 이모작으로 마늘이나 양파 추수를 끝낸 다랭이논을 일구어 모내기 준비가 한창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마쳤거니 뜨문뜨문한데 비해 이곳은 이제 시작이다. 도연명의 사계(四季)중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봄 물은 사방의 못에 가득하고)이란 구절처럼 설흘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논마다 가득하다. 그 모습이 내 논에 물들어가는 것처럼, 아이 입에 밥 들어가는 것처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푸짐하다.

가천 다랭이마을은 바다가 눈앞에 펼쳐져 있지만 배 한척 없는 마을이다. 배다를 유유히 떠다니는 어선들이 그림 속의 떡 화중지병인 것이다. 이는 마을이 설흘산 기슭에 자리 잡고 있어 해안선이 절벽이다. 방파제는 물론 선착장도 만들 수 없다보니 주민들은 척박한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이다. 이조차 녹록하지가 않다. 경사도가 상당하다보니 생각 끝에 다랭이논을 만든 것이다. 한 층, 한 층 석축을 쌓아 올려 전답을 꾸미다보니 모양도 제각각, 크기도 제각각으로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전답이 작다보니 삿갓을 씌우면 보이지 않은 정도라 삿갓배미, 삿갓다랑이 또는 소출이 죽이나 밥 한 그릇과 바꿀 정도로 전답이 작다고 해서 죽배미 또는 밥배미로 불리기도 한다. 이에 관한 일화로

”남해군 남면에 위치한 다랭이마을은 옛날 한 농부가 일을 하다가 논을 세어보니 논 한 배미가 모자라 아무리 찾아도 없기에 포기하고 집에 가려고 삿갓을 들었더니 그 밑에 한 배미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남해 가천 다랭이마을 암수바위. 이원선 기자
남해 가천 다랭이마을 암수바위. 이원선 기자

남해 가천마을에는 다랭이논도 유명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13호인 암수바위가 유명하다. 미륵사상에 따라 마을 사람들은 숫바위는 숫미륵, 암바위는 암미륵으로 숭상하고 있다. 따라서 주민들은 미륵불이 발견된 날을 기해 제사를 올린다, 제사는 부정 없는 동민 중에서 제주와 집사를 선정해 제를 올린다. 미륵에 대한 제사이므로 어육과 술을 일체 쓰지 않고 과일, 떡, 나물 등을 제물로 쓴다. 제사의 목적은 마을의 무사태평과 풍농,풍어의 기원이다.

우리나라 성기바위(男根石)로는 가장 큰 것으로 추정하며 숫바위는 높이 5.8m, 둘레는 약 1.5m로 발기한 남자의 성기 모양이다. 숫바위 옆에 비스듬하게 누운 암바위는 배가 불룩한 것이 아기를 잉태한 여인의 모양으로 높이 3.9m, 둘레 2.5m다. 숫마위는 마을을 향해서 섰고, 암바위는 서쪽을 바라보고 누워있는 형상이다. 서로 짝을 이룬 형상으로 숫바위는 인공으로 조각을 한 것처럼 착각할 정도로 귀두와 힘줄이 사실적이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이런저런 말이 오가는 중에

“이 바위도 만져도 아들을 낳을 수 있나요?”묻는다. 그 말에 모두가 웃는다. 이 시국에 웬 아들타령인가 싶기도 하지만 눈앞에 나타난 남근석에 거는 해프닝인가 싶기도 하다.

안내문에 의하면

이 암수바위를 이곳 사람들은 미륵불(彌勒佛)이라 부른다. 그리하여 숫바위를 숫미륵, 암바위를 암미륵이라 일컫는다. 숫미륵은 남성의 성기와 닮았고, 암미륵은 임신하여 만삭이 된 여성이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1751년(영조27)에 남해 현령(縣令)조광진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내가 가천에 묻혀 있는데, 그 위로 우마(牛馬)가 다녀 몸이 불편하니 꺼내어 세워주면 필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후 현령이 이 암수바위를 꺼내어 미륵불로 봉안하였다. 또 논 다섯마지기를 이 바위에 바치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어민들은 지금도 이 바위를 발견한 날인 음력 10월 15일을 기해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면서 뱃길의 안전과 많은 고기가 잡히기를 빌고 있다. 이 바위는 원래 풍요(豐饒)와 다산(多産)을 기원하던 선돌(立石)이 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기능이 바다와 마을 수호신으로 확대되어 미륵불로까지 격상된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래 지녔던 풍요와 다산의 기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곳은 오늘에도 아들을 갖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장소로 남아있다.

소가 하던 일을 기계가 대신하고 있다. 이원선 기자
소가 하던 일을 기계가 대신하고 있다. 마을 앞 쪽은 바다다 이원선 기자

5월 30일(일)을 맞아 길 가장자리에서 주차 봉사에 나선 어르신들을 만났다. 빨간색 봉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자리에 앉아 계시기에

“할아버지 논에 모심기를 위해서 소를 몰아 써레질은 언제나 합니까?”묻자

뜨악한 표정을 쳐다보더니, 웬 고릿적이야기를 하냐는 듯 바라다보다가

“원~ 세상에 요즈음은 그런 것 없습니다. 농기계가 논에 맞게 조그마하게, 쓰임새에 맞게 얼마나 잘나오는 데 소를 부립니까?”한다.

한참 후에 그 말이 참이라는 것을 알았다. 삿갓만큼 작지는 않지만 작은 논에 기계가 들어서 ‘음~매!’하는 소 울음 대신 ‘윙웡~ 크르릉 크르릉!’하는 굉음을 토해내며 논을 다듬고 있다. 이래저래 소가 필요 없는 세상이 되었다. ‘코로나19’가 만연하기 전 이 맘 때 쯤에는 옛 정서를 찾는 사람들을 위해서 소를 부려서 농사짓는 모습을 재현하는 행사가 있다. 그마저도 작금의 상황에서 멈추다보니 옛날은 이제 완전히 옛날이 된 것만 같아 안타깝다. 마을에서 소를 키우지 않다보니 ‘코로나19’란 사태가 끝난다 해도 재현 행사는 어려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