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열의 앵두나무 열매 앵도!
정열의 앵두나무 열매 앵도!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1.05.28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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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물주가 만든 색깔 중에 저리도 붉은 색이 있을까?
임금의 은덕을 입었음에 어찌 꾀꼬리에게 먹게 하오리까?
멋진 낭군님을 만나 붉은 사랑을 나누고 싶었으리라!
명례성지 배꼽마당에 유독 홀로 붉은 앵두나무. 이원선 기자
명례성지 배꼽마당에 유독 홀로 붉은 앵두나무. 이원선 기자

밀양 명례성지에서 붉은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앵두나무를 만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천주교 명례성지를 갈려고 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낙동강 방죽으로 넓게 핀 금계국을 만난 뒤 할 일 없이 어슬렁거리다가 들린 곳이 명례성지였다. 배꼽마당으론 키 낮은 잔디가 곱게 깔려 있었고 까만 열매가 5월의 햇살 아래 토실토실 영글어가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방학 숙제로 1홉인가? 2홉인가를 훑기 위해 천방둑에 배를 깐 기억이 오롯하여 옅은 웃음기를 머금고 돌아본 담장 아래, 예의 앵두나무가 있었다. 열매가 너무 붉어서 눈길을 끌었다. 절로 발걸음이 움직인 것이다. 조물주가 만든 색깔 중에 저리도 붉은색이 있을까 싶어 선지도 모른다.

앵두나무는 중국 북서부가 원산지다. 우리나라에는 최치원의 글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이전에 전래 된 것으로 추정된다. 수고는 약 2~3m 정도로 4월 초순경에 매화를 닮은 꽃이 흰색 또는 연분홍색으로 핀다. 이후 두 달 남짓, 5월 말이나 6월 초순경에 초고속으로 익는다. 과일이 귀하던 고려 때는 임금의 혼백을 모신 종묘의 제사상에 먼저 올릴 만큼 대접받던 앵두였다. 하지만 열매가 아름답고 풍성하기는 하나 식용으로는 환영받지 못하고 간혹 약재로 쓰인다. 이는 앵두는 지름이 1cm 정도인 데 반해 씨앗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옛날 먹거리가 귀한 시절에는 간식거리로 많이 찾는 과일 중 하나였다.

핏빛처럼 붉은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앵두나무. 이원선 기자
핏빛처럼 붉은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앵두나무. 이원선 기자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에 보면 앵두편(䭏)을 만드는 방법이 나오는데, “앵두를 끓는 물에 반쯤 익혀서 씨를 발라내고 잠깐 데친 후, 체로 거른 다음 꿀에 졸여 섞고 엉기면 베어 쓴다”라고 했다. 《동문선(東文選)》에는 최치원이 앵두를 보내준 임금에게 올리는 감사의 글이 실려 있다. “온갖 과일 가운데서 홀로 먼저 성숙함을 자랑하며, 신선의 이슬을 머금고 있어서 진실로 봉황이 먹을 만하거니와 임금의 은덕을 입었음에 어찌 꾀꼬리에게 먹게 하오리까?······.”라고 적고 있다. 또 《국조보감(國朝寶鑑)》에 보면 문종(1450~1452)은 항상 후원에다가 앵두나무를 심고 손수 가꾸어 잘 익으면 따다가 세종에게 올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에 세종은 맛을 보고나서 “밖에서 따 올리는 앵두 맛이 어찌 세자가 직접 심은 것만 하겠는가”라고 했다 한다.

앵두는 꾀꼬리가 먹으며 생김새가 복숭아와 비슷하다고 하여 ‘앵도(鶯桃)’라고 하다가 ‘앵도(櫻桃)’가 되었다. 옛 문헌에 앵(櫻)은 벚나무로 읽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또 《해동농서》에는 앵두를 ‘함도(含桃)’라고 하였으며, 가장 굵고 단단한 것을 ‘애밀(厓密)’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리나라 대중가요에도 앵두나무에 대한 노래가 있다.

“앵두나무 우물가에/ 동네 처녀 바람났네/ 물동이 호밋자루/ 나도 몰래 내던지고/ 말만 들은 서울로/ 누굴 찾아서/ 입분이도 금순이도”후락, 가수 김정애 씨가 불러 히트 한 “앵두나무 처녀”란 노래다.

낙동강 방죽을 뒤덮은 금계국과 타국 여인. 이원선 기자
낙동강 방죽을 뒤덮은 금계국과 타국 여인. 이원선 기자

앵두나무 열매는 붉다. 붉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핏빛이다. 붉은색은 정열적이다. 단순호치(丹脣皓齒)라 하여 미인의 조건으로 붉은 입술과 하얀 이를 들었다. 잘 익은 앵두의 빨간 빛깔은 미인의 입술을 상징한다. 앵두같이 예쁜 입술을 앵순(櫻脣)이라고 부른다. 그런 나무가 우물가에 있었으니 봄 처녀의 가슴이 울렁거렸음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동네의 어느 총각을 마음에 두었으면 모르겠거니와 이도 저도 아니라면 꿈을 좇아 대처로 나가고 싶었으리라! 멋진 낭군님을 만나 붉은 사랑을 나누고 싶었으리라!

봄꽃이 잎사귀를 접어 잔디밭 위로 팔랑팔랑, 난분분 떨어지는데 유독 앵두 열매만 저 홀로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자꾸만 마음이 가고 눈길이 간다. 초등학교 시절 도화지 위로 그린 짝꿍의 붉은 입술 같아 자꾸만 돌아다보는 것이다.

한발 대문을 나서자 방죽이 온통 금계국으로 짙은 황금색이다. 그중에 카메라를 든 여인이 무수한 꽃 속에 홀로 들어있다. 한 폭의 파스텔 톤의 수채화 속에 든 여인, 분명 한국 여인은 아니다. 타국 땅 이 나라를 찾았을 때는 미래를 향한 붉은 여심이 가슴속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촬영한 사진을 보여주자

“예쁘게 찍었네요! 감사합니다”며 돌아서는데 앵두 빛 붉은 입술에 발그스레한 얼굴이 금계국 빛으로 물들어 화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