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에세이 12] 산드로 보티첼리의 ‘동방박사의 경배’
[성화에세이 12] 산드로 보티첼리의 ‘동방박사의 경배’
  • 이동백 기자
  • 승인 2021.03.0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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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5년 경, 템페라, 피렌체 피우치 미술관
1475년 경, 템페라,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태복음 2:9~11)

그날,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던 날의 베들레헴 마을은 어떠했을까? 아기 예수가 탄생하는 그 엄숙한 순간에 동방 박사들이 들이닥쳐 예수 탄생을 경배하였다. 경배의 자리 반대편에서는 헤롯왕의 시기심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이는 지독한 역설이다.

베들레헴의 말구유를 찾은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에게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이 예물은 장차 아기 예수의 삶을 상징한다. 황금은 오직 임금만이 소유할 수 있는 보석으로 왕권을 상징한다. 거룩한 제사에만 사용하던 유향은 신성을, 몰약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상징한다. 이것들은 신성을 지닌 왕 중의 왕으로서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죄에서 인간을 구원할 이가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계시하는 객관적 상관물이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동방박사의 경배>는 제목 그대로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를 찾아가서 경배하는 광경을 포착한 그림이다. 아기 예수가 탄생한 자리인 말구유가 마치 허물어지다만 성채 같아 이채롭다. 세 명의 동방박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사람 여럿이 모여들어서 경배의 분위기가 한결 뜨겁다. 아기 예수를 무릎에 앉힌 마리아는 앳되고 인자한데, 경배하는 광경을 턱을 괴고 바라보는 요셉의 늙수그레한 모습이 마리아와 대비를 이룬다.

그런데 이 성스러운 그림에 인간의 알량한 욕심이 끼어들었다는 사실이다. 이 그림은, 보티첼리가 델마라라는 사람의 부탁을 받아 그렸다. 당시 피렌체를 장악하고 있던 메디치가의 환심을 사서 이권을 챙기려는 델마라가 메디치가의 인물들을 그림에 넣어달라는 요구를 받은 보티첼리는 메디치가를 일으킨 코시모를 비롯하여 그의 3세대를 그림 속에 그려 넣었다.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인물이 코시모, 붉은 망토를 입고 중간에 꿇어앉은 이가 코시모의 아들 피에로, 오른쪽에 검은 망토를 걸친 검은 머리의 사나이가 손자 로렌츠이다. 욕심이 엉뚱한 인물을 동방박사로 둔갑시켜버린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 화가가 남긴 그림은 찬란하게 살아 예수 그리스도를 빛내고 있다.

여기서 하나 더 재미있게 기억해 둘 만한 사연이 이 그림 속에는 존재한다. 그림 속의 모든 이들이 아기 예수에게 집중하는데 유독 한 사나이만은 전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림의 오른쪽 가장자리에 선 사나이가 그다. 그는 보티첼리이다. 조금은 거만한 듯도 하고, 뭔가 조금은 못마땅한 표정이다.

어쨌거나 2천 년 전 아기 예수가 탄생하던 베들레헴에는 아마 하나님의 은총이 빛처럼 내렸으리라. 성령이 비둘기처럼 한없이 한없이 쏟아져 내렸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