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에세이 11]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디트’
[성화에세이 11]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디트’
  • 이동백 기자
  • 승인 2021.02.2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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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 유디트 1, 1901. 유채, 벨데데레 빈 오스트리아 미술관
구스타프 클림트, '유디트 1', 1901. 유채, 벨데데레 오스트리아 미술관

구스타프 클림트의 유디트에서 적장의 수급을 수습하고 개선하는 상황에서 팜므 파탈을 찾는 일은 어쩌면 무모할는지도 모른다. 잔 다르크 같은 영웅적 이미지가 클림트에게는 아예 고려의 대상이 아닌 듯하다.

언뜻 보아 넘긴다면 클림트의 그림에는 관능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다. 앞섶을 풀어헤치고 입을 반쯤 벌린 모습과 미처 관능의 몰입에서 헤나지 못한 듯한 실눈, 부풀어 오른 머리. 그녀는 온몸으로 성적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처진 눈꼬리는 눈을 한껏 게슴츠레하기 만들어버리는데, 여기에 관능이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그녀의 손에는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수급이 들려 있다. 검은색에 갇힌 적장의 수급은 화폭의 가장자리에 겨우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그것도 반 넘어 잘린 채 말이다. 이것은 클림트가 고국의 원수를 갚은 전쟁 영웅의 이야기를 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로써 클림트의 유디트는, 의부 헤로데 왕에게 세례 요한의 목을 요구하는 살로메로 착각하게 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관능 저편에 감춰진 살기를 무엇을 통하여 찾을 수 있을까. 도대체 클림트는 유디트에게서 살인자의 살기를 읽기나 한 것인가? 그것을 생각했다면 그 살기를 어디다 숨겨 놓은 것인가. 도저히 내 눈으로는 찾을 수 없다. 클림트의 유디트를 음습한 숭고미로 해석한 이주헌 교수의 혜안에 기대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유디트의 어깨를 장식한 황금빛을 띤 생명 나무는 목숨을 잃은 검은 홀로페르네스와는 대조를 이룬다. 그래서 생명 나무는 유디트이다.

결국 클림트의 유디트에는 관능과 생명과 죽음이 혼재한다. 이것은 곧 인간의 존재 양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