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임종도 못 하게 한 코로나
아버지 임종도 못 하게 한 코로나
  • 유무근 기자
  • 승인 2020.11.23 10: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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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발 한국에 도착하여 2주간 격리된 남매

"아빠, 이제 열 밤만 더 기다려 주세요" 자식은 발을 동동 구른다.

“기다려 줄게” 아버지는 약속을 지켜내었다.

“자가격리 2주간의 기간이 이토록 초조하고 긴 시간인 줄 몰랐습니다.”

이렇게 만난 금지옥엽 같은 조카 남매의 아버지 상봉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무슨 말들이 필요하겠는가? 눈물 콧물이 범벅된 채 얼굴을 비벼대는 모습에 간병인도 보호자도 조심스레 그 자리를 비켜주었다.

삼촌으로부터 소식을 받고 단숨(?)에 날아와 생존한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열흘 후 교수로부터 퇴원 권유를 받았다. 약물 투여를 안 하고 집에서 편안히 보내드리는 것도 효도라는 쪽으로 무게가 실린다.

8월 중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단체시설인 요양병원 등에 확진자 발생이 증가하고 뉴스 채널마다 방역수칙 강화 지침이 실시간 방영되고 있었다.

퇴원이 결정되었지만, 여건상 자가(自家) 간호가 여의치 않아 인근 요양병원에 재입원하기로 의견을 다시 모았다. 병원 측에서 알선한 구급차로 가족 일행이 요양병원에 도착하였다. 요양병원은 현관 입구부터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친절은 커녕 경계와 제재를 하면서 방역 분류장 같은 삼엄한 분위기였다. 열 체크와 방문자 기록을 하고 기본 수칙은 물론, 강화된 요양병원 측 수칙 설명을 듣는데만 서서 20여 분이 소요되었다.

"정부 지침이 없는 한, 누구라도 면회는 안 됩니다." 이는 사무실 지정 간병인을 통하여만 소통할 수 있다는 수칙이다.

귀국할 날짜가 일주일 남짓 남아 초조한 날의 연속이다. 귀국하여 다시 나와야 할 형편이다. 다시 들어오면 또 14일 체류해야 하고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아버지 임종을 위해 미국에서 왔으니 자녀들만이라도 짧게나마 면회를 허락해 달라고 간곡하게 애원했다.

끈질긴 설득과 병원장 아량으로 일주일 후 오전에 별실에서 특별 면회 약속을 받아내었다. 가족들은 아버지 침상에 둥글게 모여 손도 잡고 이마에 손도 얹고 희망의 인사말을 전했다. 담당 간병사가 내려와 “할아버지 이제 올라 가입시더”라고 한마디 던지고 침상을 이동하는 모습이 저승사자같이 느껴졌다. 이것이 마지막 대면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8월 30일 이른 아침 위독하다는 병원 측의 급보를 받고 달려왔으나, 이미 운명하시고 말았다. 별실에서 주무시는 듯한 아버지 시신 위에 엎어져 오열했다. 아버지께서는 한 번 더 기다려 주시지는 않았다. 코로나가 뭐길래 부자간에 아버지 임종의 천륜도 흩으러 놓는가 말이다.

종교 생활로 다져온 많은 인맥의 노인들이지만, 코로나 정국에서는 아무도 조문하지 않았다. 좋게 말하면 가족 간에 조촐한 장례식이었고, 한편으로는 어차피 혼자 가야 하는 쓸쓸한 장례식장이었다.

조문하기 위해 모처럼 나타난 친인척들도 검고 흰 마스크를 종일 덮어쓰니, 누가 누군지 인식조차 힘든 세상으로 변질시킨 것은 악마의 저주일까?

악마의 저주라면 언제까지 갈 것인가. 끝나기는 할 것인가? 답답하여 테스 형이라도 목청껏 찾고 싶은 심정이다. 아버지는 쓸쓸한 침상에서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처자식이 있는 미국으로 갑시다. 유골이지만, 아버지와 함께 탑승할 수 있게 되어 행복합니다. 임종을 못 해 불초소생 엎드려 통곡합니다. 편히 잠드소서."

코로나로 인하여 가까이서 아버지의 임종도 보지 못한 채 유골을 안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조카 남매의 경험담을 소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