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의 영웅 백선엽 장군 큰 별로 영면
구국의 영웅 백선엽 장군 큰 별로 영면
  • 유무근 기자
  • 승인 2020.07.13 10: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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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영웅임에도 조문객이 많지 않다.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 승전기념관에 차려진 빈소에서 14일 오후 6시까지 조문할 수 있다.

 

故 백선엽 장군 빈소가 칠곡 '다부동전쟁기념관' 마당에 차려져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유무근 기자

 

한국전쟁의 영웅이자 창군(創軍) 원로인 백선엽 장군이 영면했다. 대구 지역 빈소(殯所)는 6·25전쟁 당시 고인의 격전지였던 경북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 승전기념관에 칠곡군(郡)이 마련하였다. 14일까지 오전 9~오후 6시 조문할 수 있다.

기자가 찾은 12일, 종일 찌푸린 날씨에 보슬비가 가랑비 되어 하늘도 장군의 영면을 애도하는 듯했다. 바람에 휘날리는 태극기도 가랑비에 젖어 묵념하는 듯했다. 고인의 서울 빈소에 비해 초라하고 조문객이 많지 않아 썰렁한 감마저 돌았다.

하늘도 고인을 애도하는 듯 가랑비가 내리고 태극기도 고개 숙여 묵념하는 듯하다. 유무근 기자

 

1920년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태어난 고인(故人)은 어린 시절을 평양에서 지낸 뒤 평양사범학교를 나왔고 1941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했다. 일본군 간도특설대에 배치됐던 백 장군은 해방 직후인 1945년 평양에 돌아왔고, 독립운동가이자 조선일보 사장이었던 조만식 선생의 비서로 일하다 김일성이 권력을 잡자 그해 12월 월남했다.

월남 직후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간 그는 1946년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부산 5연대 중대장을 맡았다. 창군(創軍) 원년 멤버가 됐다.

6·25전쟁 직전인 1950년 4월 대령으로 제1사단장이 되어 개성 지역을 담당했고, 전쟁 발발 당시 고급 간부 훈련을 받고 있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에 백척간두의 위기였던 조국을 구한 장군으로 유명하다. 경북 칠곡의 낙동강 전선 다부동 전투에서 그는 패퇴 직전인 아군에게 “내가 앞장설 테니 내가 물러서거든 나를 쏴라”며 인민군이 점령한 고지로 뛰어 올라갔고 전세를 뒤집었다. 많은 6·25전쟁 전사가들은 백 장군 사단이 이 전투에서 패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이구동성이다.

2019년 10월 11일 '낙동강 세계평화 문화대축전 전승행사' 장에서 백선기 칠곡군수로부터 명예 군민증과 공로패를 수상받는  백선엽 장군의 생전 모습.  유무근 기자
백 장군을 애도하는 다부동 주민들의 애틋한 정성이 현수막에 담겨 있다. 뒤로 당시 격전지였던 유학산자락 일부가 조금 보인다.   유무근 기자

 

서른두 살 한국 최초의 4성 장군이 이끄는 1사단은 인천상륙 작전의 계기가 되었고 그는 북진의 선봉에 섰다. 1951년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 동부전선 붕괴를 막아내기도 했다. 1952년 7월 백 장군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정전 회담 때에는 한국군 대표로 참가했다. 백 장군은 1959년 합참의장을 지낸 뒤 1960년 5월 31일 예편했다. 태극무공훈장을 두 차례나 받았다.

그러나 공(功)은 뒷전이고 친일 여부로 장지(葬地) 선정으로 진영 간에 시끄럽다.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가나 대전 현충원으로 가나 유학산에 묻히나, 장군은 떠나도 애국 한국인의 얼에는 길이 길이 영웅으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