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견을 무지개 다리 너머로 보내고
반려견을 무지개 다리 너머로 보내고
  • 강지윤 기자
  • 승인 2020.09.28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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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함께했던 시간이 내겐 커다란 위안이자 기쁨이었다. 다른 사람에게 표현할 수 없거나 소통되지 않았던 불편한 감정들도 너와 함께 놀다보면 나도 너처럼 어느새 단순해져 있었다.

 

13년을 가족으로 살았던 반려견 '벅지'의 모습  강지윤 기자
13년을 가족으로 살았던 반려견 '벅지'의 모습. 강지윤 기자

2020년 3월 19일, 13년을 함께한 반려견 ‘벅지’가 무지개 다리를 건너갔다. 뒷산에 진달래가 지고 늦게 핀 늦깎이들만 간혹 몇 송이 남아 있을 즈음이었다. 상심(傷心)의 의미를 몸으로 체득했다. 상실의 고통이 어떠하다는 걸 몸으로 철저히 알아갔다. 13년을 같은 시공간에서 함께한다는 일이 의미하는 바가 무언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몸이 죽을 만큼 아팠다.

매일 함께한 산책길, 마트나 시장길에도 껌딱지처럼 따라 나섰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도 책상 아래서 한없이 기다릴 줄 알았으며, 요리, 청소나 설거지 등 엄마가 바삐 움직일 때는 놀아 달라고 조르는 법이 없다가도 그 일이 끝나는 순간이면 귀신같이 알아채고는 장난감 물고 나타나 놀아달라 들이대는 녀석이었다.

더러 함께 여행을 떠나면 창문에 붙어서서 창밖 풍경을 보며 느긋하게 새로운 세계를 바라 보는 여행가였고, 차창을 열어주면 바로 고개를 내밀고 킁킁 새로운 공기냄새를 맡으며 지그시 눈을 감고 바람에 휘날리는 털의 감촉을 음미하는 명상가이기도 했다.

주말 산행이라도 하려고 배낭을 챙기면 ‘아, 나도 오늘은 등산이구나’ 눈치채고 밥도 마다하고 흥분해서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채비가 끝난 남편이 먼저 나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기다릴 때, 뒷 마무리가 남은 내가 아직 집에 남아 있기라도 하면 녀석의 조바심은 절정이었다. ‘엄마 뭐해, 가야 되는데...’ ‘아빠 아직 가지마 엄마도 같이 가야지...’ 열린 현관문과 엘리베이터 사이를 바람처럼 오가며 그의 아드레날린 수치도 최고점을 찍었다.

등산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노즈워크(Nose Work: 냄새로 여러 가지 사물과 환경을 알아가는 일)에 빠져 앞서 가다가도 정신이 들어 우리를 쳐다봤을 때 누군가 없으면 나타날 때까지 꼼짝않고 기다렸다. 걸음이 늦은 내가 벅지 시야에 들어와야 비로소 이동하는 녀석이었다. 2~3시간의 등산길이 몸무게 7kg도 안되는 시츄에겐 히말라야 등정만큼이나 힘이 들 텐데도 군말없이 완주하고야 말았다. 집에 돌아와서 코를 드르릉거리며 한두 시간 늘어지게 낮잠을 즐기긴 했지만...

그렇던 녀석이 두어 달 전부터 밥을 잘 안 먹고 간식만 내놓으라 했다. 식사 버릇이 나빠졌구나 하고 좋아하는 간식을 뿌려 주기도 하고 사료를 바꿔 주기도 했지만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예방접종과 미용을 위해 가는 단골병원 수의사 선생님은 녀석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근육도 만져보고 치아도 보고 귓속도 뒤집어 보고 싱긋 웃으며 말하곤 했다. “야, 벅지야. 니 근육이 나보다 훨씬 낫다”, “치아도 건강하고 다 좋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침 저녁 두 번씩 나서는 산책길에선 집에서 멀어질수록 신나 하던 녀석이 언제부턴가 대소변이 끝나면 바로 돌아서고 말았다.

그날도 저녁 설거지를 끝내고 함께 집을 나섰다. 그런데 10m 정도도 가지 않아 돌아서는게 아닌가. 산책을 가기 싫어 꾀를 부리는 것 같았다. 밥을 잘 안 먹는게 운동량이 줄어서인 것 같기도 하고. '먹는 것도 사료 말고 간식만 먹으려 하더니 산책마저 안 하려고 꾀를 부리다니...' “벅지 왜 그래, 할 수 있잖아”하며 목줄을 확 끌어 당겼다. 순간 균형을 잃고 녀석의 몸이 기우뚱 한 쪽으로 뒤집혔다. 평소와는 다르게 노기섞인 음성에 겁이 난 녀석은 별 말 없이 평소의 반쯤 산책을 하고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우울 모드로 웅크려 앉은 모습을 보니 그제서야 의심이 들었다. 어디가 불편한 게 아닐까? 자세히 살펴보니 며칠새 날름거리는 분홍빛 혀의 색깔이 희미해지고 깍은 털 사이로 비쳐 보이는 몸의 빛깔도 연해진 것 같았다.

다음날 종합검진을 했다. 빈혈 수치가 높고 간의 염증수치도 높으니 2차 병원으로 가보라는 것이었다. 불안 속에 녀석을 안고 2차병원으로 갔다. 내부 장기의 종양 때문인가 싶어 복부초음파 검사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 정밀 검사에 들어갔다. 검사에 검사를 거듭하면서 윤곽이 드러났다. 적혈구 숫자가 현저히 줄고 세포의 크기도 쪼그라들어 있었다. 문제는 결과는 나왔는데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유전적인 문제일 가능성이 높지만 마땅한 치료법은 없다는 것이다. 대증요법으로 면역 억제제와 철분제를 처방받아 일주일간 복용하고 다시 검사하기로 했다.

약을 복용하니 차츰 입맛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사료 대신 좋아하는 음식으로 바꿔 먹였다. 하루 세 끼를 전쟁 치르듯 메뉴 바꿔가며 약과 번갈아 먹여도 적혈구 수치는 계속 떨어지고 결국 수혈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단계가 되었다. 오후 두 시에 시작된 수혈은 밤 10시가 되어서야 끝이 났다. 담당 선생님은 그랬다. 두 달 정도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라고. 그 시간동안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방법이 없다면 남은 두 달만이라도 마지막 작별을 준비해야겠다 마음먹고 온 몸과 마음으로 녀석과 함께 했다.

코로나로 어려운 때라 최소한의 외출 말고는 집에서 지내는데 긴한 볼 일이 있어 외출을 했다. 돌아오니 언제부터였는지 현관 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날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밥도 먹는 둥 마는 둥하더니 저녁도 역시 거부였다. 주사기에 꿀물을 타서 줘도 토해냈다. 그러더니 소변을 하고 싶어 하길래 안으니 주르륵 쉬가 흘러 내린다. 단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는 녀석이었다. 반드시 밖에서만 용변을 보았다. 대변은 딱 한 번, 빈집에 혼자 있을 때 급했던지 화장실 양변기 앞에 실례한 적이 있을 뿐이었다. 실수한 그 순간 녀석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엄마 미안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벅지야 괜찮아. 니가 쉬한 거 엄마가 닦으면 되지. 다 괜찮아. 녀석의 몸을 닦아주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두 달이 아니라 두 주가 되기도 전이었다.

몸에 열이 나니까 차가운 마루 바닥에 몸을 대고 싶어했다. 솜을 차가운 물에 적셔 귀를 닦아주며 그렇게 둘이 밤을 새웠다. 창밖이 훤해지는걸 보고 녀석을 안고 매일 다니던 산책길을 한바퀴 돌아왔다. 우리만의 의식을 치르고 집에 돌아와 방석 위에 눕혔다. 정오가 막 지날 무렵 가늘던 호흡이 흐려지고 몸이 한 번 떨렸다. 그게 우리의 인연이 툭 하고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쓰다듬어 눈을 감기고 아직 따스한 몸을 품에 안았다. 깨끗한 인조천으로 곱게 싸고 네 개의 매듭을 묶어 아파트 뒷산, 햇볕 따스하고 산책길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녀석을 묻었다. 한적하고 고사리가 무성히 자라 눈에 잘 띄지않는 곳이었다. 벚꽃이 점점이 흩어지고 늦게 핀 진달래가 띄엄띄엄 남아 있었다. 녀석을 묻어 두고 내려오는데 마음 둘 곳이 없었다.

아파트가 내려다 보이고 한적한 곳, 고사리 푸른 잎이 가려주는 곳에 잠들어 있다.  강지윤 기자
아파트가 내려다 보이고 한적한 곳, 고사리 푸른 잎이 가려주는 곳에 잠들어 있다. 강지윤 기자

고삐 풀린 말처럼 내달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집안을 샅샅이 뒤져 청소를 하고, 걷고 또 걸어도 마음은 금새 한 생각으로 돌아와 있었다. 마지막 날 밤 '엄마 뭔가 불편한데 어쩜 좋지' 날 부르듯 바라보던 애절한 눈빛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침대에서 쉬기라도 하면 꼭 따라 올라와서 좋아라 부비부비에, 쓰다듬어 주면 온 몸을 가만히 내맡기고 음미하듯 스르르 잠 속으로 빠져들던 그 따스함과 평온함, 어리광, 삐침. 조르기... 그런데 마지막 산책길에 내가 줄을 세게 당겼던 그 저녁 이후로 그와 나 사이의 무한 신뢰에 금이 하나 갔다. 부비부비를 안하는 것이었다. 불안하고 불편한데, 엄마가 제일 미덥기는 하지만 예전의 그 엄마는 아니야 라는 그 느낌이었다.

두어 달, 그 의지가지 없는 불안한 한 생명을 좀 더 잡아두고 싶어 기울인 온갖 정성에도 마지막 순간 엄마에 대한 무한 신뢰에서 하나의 점이 빠져나간 그 자리. 그 자리가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가슴을 찔렀다. 서운하게 보냈구나. 널 그렇게 보냈구나. 마음이 산란할 때 틈틈이 올라가 돌을 주워 둥그렇게 원을 만들고 고운 황토흙 걷어다 이불 덮어 주고, 비 그친 뒤면 궁금해서, 맑은 날이면 날씨가 너무 좋아 산길을 오르락 내리락한다. 그새, 주먹 쥐었던 고사리 순은 스르르 펴져 무성히 자랐다.

선별 진료소를 찾아 검사를 해 볼만큼 지독한 아픔도 지나갔다. 이제 너를 보낸다. 너와 함께한 시간을 보내고 못다 한 회한도 보낸다. 너의 한 생애 많은 부분을 기다림으로 채우게 했던 자책도 보내고 무한 신뢰를 거두게 했던 바늘도 뽑아서 버린다. 잘 가거라 벅지야. 더 잘 돌보아주지 못했던 나를 용서해 다오. 10여 년 함께했던 시간이 엄마에겐 커다란 위안이자 기쁨이었다. 때로 표현되지 못한 마음이나 소통되지 않았던 불편한 감정들도, 너와 함께 펄쩍펄쩍 뛰어 다니며 아무말대잔치를 하고, 간식 찾아먹기를 하며 놀다 보면 나도 어느새 딱 너만큼만 생각하게 되었다. 한때는 우리 가족이었던 생명, 자연으로 돌아간 너를 이제는 마음으로 떠나 보낸다. 우리가 네게 했던 것 보다 훨씬 많은 기쁨과 위안을 우리에게 선물처럼 남기고 간 벅지. 잘 가거라. 다음 생애에는 좀 더 행복한 생명으로 돌아오너라.